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6)
"대단하군. 저 녀석의 마음은 끔찍할 만큼 실러오나의 것이다.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길 만
도 한데‥ 오히려 더 강해졌어. 데린, 잘 봐둬. 우리는 앞으로 만들어질 또 하나의 전설을 보고 있는지도 몰라. '세
일피어론다으의 성자, 블리세미트‥ 불꽃의 시험을 받다.'라는 전설을‥."
불의 뱀이 거대한 신체의 끝인 꼬리를 들어서 내려쳤다. 아리에와 블리세미트는 양쪽으로 갈라지며 피했고 바닥에
부딪힌 꼬리는 불꽃을 흩날렸다. 블리세미트는 사막에서의 뱀은 바닥에 배가 닿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땅을 박찼다.
화르르륵.
하지만 오판이었다. 불의 뱀은 입에서 하나 가득한 불꽃을 확하고 내뱉었던 것이다. 블리세미트는 성투결계의 힘을
모아서 막아냈지만 감히 더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넬피엘을 향해 소리쳤다.
"저 놈은 뱀이 아닙니까! 왜 불을 뿜는 거죠?"
"사막에 살았으면서 뱀이 독액을 내뿜는 것도 모르냐? 저 놈은 불뱀이니 불을 내뿜는 게 당연하지."
기가 막힌 블리세미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로 그럴 것이 뱀이 독액을 내뿜기는 했지만 눈이나 상처가 아닌
이상은 큰 피해를 미치지 못했다. 즉 불처럼 파괴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의 뱀은 꼬리를
휘둘렀고 블리세미트는 간신히 옆구리의 타격을 막고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리에는 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으므로 블리세미트처럼 몸이 굳어지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뱀의 습성을
상대에게 적용하기보다 불의 성격을 적용했다. 무엇인지 품에서 한 주머니의 흰 가루를 꺼낸 그녀는 물을 섞어 검
의 표면에 바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레스난에게 아크로나의 껍질 분말을 얻어두길 잘했어.'
아크로나는 조개류의 하나로 껍질이 고밀도 석회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궁에서는 조개껍질 가루를 물에 엷게 개
어서 불이 났을 때 사용하는데 서민들은 잘 모르는 방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크로나는 바다 깊은 곳에서만 서식
하여 왕궁에서도 급할 때만 사용하는 조개였는데 그 속살의 맛도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리에는 혹시나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여 레스난에게 얻어두었던 것이다.
연금술사들은 조개껍질이 물과 닿으면 나오는 기체가 소화(消火)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기체의 이름을 소화기
(불을 끄는 기체)라고 이름지었다. 아리에는 망고슈가 아닌 시미터에 아크로나의 껍질을 말랐는데 조금이라도 소화
기가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적중해서 불의 뱀은 소화기가 몸에 닿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배시시하고 웃으며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리에. 파마리나는 그녀가 마녀의 소질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순진
한 웃음 속에 가득히 풍겨 나오는 요기(妖氣)는 천부적이었다.
"그녀는 현명하군."
젠티아의 말에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를 골탕 먹일 때만 아니라면 아리에의 영악함은 분명 장점이었다.
"얍!"
빠른 그녀의 시미터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소화기는 불의 뱀을 괴롭혔다. 하지만 재생하는 시간을 느리게
할 뿐 결정타를 줄 수는 없었다. 아리에는 화가 나서 불뱀을 마구 난도질했다. 흩어질 듯 흩어질 듯 하면서도 불씨
는 꺼지지 않는다. 그 때 블리세미트가 달려와서 높이 점프했다.
"아리에, 비켜요."
소년은 낙하속도를 주먹에 담아서 뱀의 정수리에 꽂았다. 아리에의 소화기로 약해진 덕에 아예 불꽃은 둘로 갈라졌
다. 하지만 다시 합쳐지려는 불꽃. 블리세미트는 주먹을 땅에 박은 채로 강하게 신성력을 내뿜었다.
"끝났군."
산산조각난 불씨들이 신성력에 맥을 못추고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젠티아는 중얼거렸다. 말은 없었지만 시즈의 눈
동자에도 생기가 도는 게 많이 걱정했던 모양이다.
"헉헉! 어때요?"
블리세미트는 한번에 격출한 신성력으로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물었다. 그만큼 성투결계라는,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혹사시키는 전투법이 어렵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에 뒤질 새라 아리에도 따라서 외쳤다.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죠?"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는 되겠군. 왜 죽고 싶어서 안달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젠티아는 투덜거리는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대고 껄껄대고 웃었다.
"고집만큼의 실력은 되지 어쩔 수 없잖아. 그럼 한 시가 급하니 난 출발하겠네. 로바메트 쪽을 부탁하지, 시즈."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시즈를 젠티아는 히죽 웃으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시즈가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젠티아는 그
런 표정이 맘에 드는지 낄낄대며 돌아설 뿐이었다.
"살아 돌아오라고. 나 없다고 죽지말고."
마차에 올라탄 레스난과 데린이 손을 흔들었다. 레스난은 가장 친했던 아리에와 블리세미트,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눈물마저 글썽였다.
"설마 두 사람이 다치진 않겠지?"
"시즈가 지켜 줄거야."
온화한 목소리로 레스난을 달래던 데린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서 한번 정도는 자신의 말을
비꼬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레스난, 파마리나 봤니?"
레스난의 금발이 설레설레 흔들렸다. 아리에는 머리 속에 마녀의 웃음이 메아리치는 것을 느끼고 손으로 천천히 이
마를 문질렀다.
"그만 나오세요, 파마리나."
"젠장. 속일 수가 없군."
장난치다가 걸린 아이처럼 뒤통수를 거칠게 긁적이며 파마리나가 나타나자 시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
에 파마리나가 다그치듯 말했다.
"뭐야!? 난 적어도 저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는 강하다고."
"인정하지. 더 이상 티격거리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가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나로서는 편하겠어. 가자고. 우리
도 마차를 구해야지."
말을 마치자마자 넬피엘은 걸음을 옮겼다. 파마리나와 블리세미트, 아리에는 서로를 마주보다가 씨익하고 웃음을 나
누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시즈만 한숨을 내쉬며 서있을 뿐이었다.
시즈들을 실은 마차가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에 도착한 것은 이틀 후였다. 사람들은 이미 떠났고 남아있는 자들은
기사들이나 병사들, 그리고 용병. 얼마 전 보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황폐해진 모습에 시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떠났군요. 과연 로바메트는 남아있을까요?"
"기사들이 남아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좋겠지."
만약 남아있는 사람이 로바메트라면 그는 정말 효웅이라고 시즈는 느꼈다. 모두 떠난 자리를 로바메트가 지키고 있
다면 그에 대한 믿음은 왕실에서나, 서민들이나 대단할 것이다.
"마녀, 점을 칠 수 있겠지? 어느 쪽에 그가 있을지‥."
"시즈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역사의 고리는 음유술사의 기운에 민감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파마리나는 물병을 기울였다. 냉동마법으로 차갑게 보존한 피였다. 주르륵하고 바닥에 떨어진 핏자
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신성한 생명의 기운에 기하여 물으니 내가 가진 수수께끼에 대답하라."
무게있는 주문의 영창에 따라 바닥의 피는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제인 블리세미트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파마리나가 쓰는 피는 닭피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심한 듯 지켜 보았다.
"동남쪽이에요."
로바메트의 저택은 대부분의 공작들과는 달리 매우, 아주 매우 간소했다. 킬유시 공작의 거대한 성과는 다르게 그는
여느 부유한 중산층 정도의 저택이었기 때문에 시즈는 더욱 놀랐다.
"그는 청렴결백하군요."
블리세미트는 저택이 작아서 놀라워하기는 처음이었다. 흑색 거성 글로디프리아를 보았을 때만큼이나 입이 벌어진
그를 향해 시즈는 작게 미소했다.
"글쎄요. 저택이 작으면 경비하기 쉬운 이점도 있답니다."
"맞는 말이야. 어떻게 잠입해야할지 모르겠군."
넬피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통의 물을 마법으로 차갑게 해서 들이켰다. 로바메트 공작은 현 실베니아의 현실에서
기사단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경호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토록 저택이 작다면 보호하는 자들은 꾸역꾸역
뭉쳐있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저런 집에는 숨어들 곳도 없다. 궁전이라면 비밀통로나, 지하통로나, 환기구 등으로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택은 굴뚝 하나로 충분할 만큼 아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