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200)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7)

시즈는 침착하게 바람이 전해주는 저택 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없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택의 잠입은 의외로 쉬울 것이다. 시즈는 알 수 있었다. 

'함정인가?' 

막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넬피엘이나 젠티아조차도 기척을 느낄 수 없던 노르벨은 정말 강적이었다. 이번에도  그

런 상대가 숨어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쓸데없는 말로 긴장을 풀어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경호하는 기사들이 너무 약한 것 같은데?" 

파마리나는 피, 즉 생명력에 민감했다. 그녀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생명력의 강약을 판단할 수 있었다. 

기사로 친다면 생명력이 강할수록 뛰어난 실력의 검사일 게 당연했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열심히 바람의 이야기를 듣던 시즈가 대끔 한 마디를 꺼냈다. 

"비밀통로?" 

"이런 저택에는 비밀통로가 있기 마련이죠. 혹시나 했는데 '바람의 눈'에 통로로 의심되는 장소가 있는 듯합니다." 

일행은 싱글거리는 시즈를 보며 '괴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시 다른  '괴물'이라고 불리는 넬피엘 또

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것이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출연빈도가 극히 적었고 그 능력에 대해서는 같은  음유술사조

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도 모르고 '괴물'은 그저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어둡군." 

파마리나의 한 마디가 무섭게 넬피엘의 손은 화륵하고 한 덩이의 불꽃을 피어 올렸다. 아리에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경비병들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이 곳에는 경비병이 없어요. 비밀통로는 그 말처럼 비밀스러운 곳이죠. 이 곳을 알고 있는 것은 공작 자신이나, 그

의 측근들 밖에는 없을 거에요." 

"시즈도 있잖아." 

시즈의 대답에 아리에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시즈의 얼굴은 불꽃을 옮겨놓은 것처럼 붉어졌다. 

"여기가 끝입니다." 

블리세미트는 어딘가에 있을 출구를 열심히 찾았다. 열정적으로 벽을 더듬고 있는 그를 넬피엘은 툭툭 치고 말했다. 

"뭐해?" 

"뭐 하다뇨‥. 출구를‥." 

블리세미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이미 다른 일행은 천장에  뚫려있는 통로로 몸을 집어놓고 있었

기 때문이다. 

"네가 마지막 남은 '사막의 사제'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붉은 뱀의 사원'을 일으키겠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블리세미트는 넬피엘이 '사막의 사제'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착각이었을까. 

냉혹하게만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온화해보인다고  소년은 느꼈다. 넬피엘은 주문을 외워  그를 공중으로 

떠올리고 자신도 천장의 통로로 몸을 밀어넣으며 대답했다. 

"이제까지 사원을 나왔던 '사막의 사제'들은 다 그랬어. 에크라이도, 크라인 대사제도." 

블리세미트는 아까 전 젠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이 나약하게만 보이는 소년이 정말로 4000년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

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언제나 바깥세상을 무섭게만 가르쳤던 에크라이를 떠올리며 순진했던 사제는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미래에 '붉은 뱀의 사원장'이 될 사제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지. 사원장이라는 직위는 쉬운 게 아니니

까. 하지만 알고 보니 단순한 방랑벽이더군." 

"실러오나의 뜻이 아닐까요?" 

어린 사제의 대답에 넬피엘은 한 방 맞았다는 듯 아찔한 얼굴을 했다. 

"누가 녀석들의 뒤를 잊지 않는 달까봐, 비슷한 소리만 해대는 군." 

그리고 곧 키득키득 웃으며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행의 예상과는 달리 공작의 경비는 적었다. 밀집되어 방어하는 인원이 막을 경우 모두 죽여버릴려고 했던 넬피엘

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블리세미트나 시즈의 공격으로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기에 불만은 없

었지만 못내 못마땅한 듯 했다. 

"츠바틴이 무슨 수를 부린 듯 하군." 

"확실히 이건 공작 저택을 경비하는 인원으로는 너무 부족하군요." 

구석으로 옮겨지는 경비병을 바라보며 아리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쉬워도 쉽다고 생각할 수가 없으니‥.' 

"어쨌든 우리의 선택은 하나 뿐입니다." 

시즈는 로바메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토록 경호가 허술하다면 로바메트

는 이미 수도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병사들은 아직 남아있는 중요문서를 옮기기 위함이다. 

"네 놈들은 누구냐?" 

경비병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복부에 강대한 충격을 받고 기절한 채 바닥을 굴렀다. 시즈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소란이냐?" 

"로바메트 공작?" 

"그래. 내가 실베니아의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이다. 그렇게 묻는 그대는 누구인가?" 

"시즈 세이서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일행이죠."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당당한 공작의 모습에 시즈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다. 

"시즈 세이서스라면, 엘시크의 젊은 현자로 이름 높았던 자가 아닌가.  '마땅찮은 이'라는 특이한 이름 때문에 더욱 

유명했지. 하지만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습니다." 

"헤트라임크의 마법으로 살아남았군." 

정곡을 찔린 시즈가 움찔하고 놀라자 로바메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세상에는 죽은 자라고 알려진 사람이 왠일로 날 찾아왔는가. 설마 마땅찮다는 이름처럼 세상에  미움을 가지

고 귀신이 되어 돌아왔는가? 그러고 보니 전장에서의 성녀는 자네의 변장한 모습이었군. 약간이지만 윤곽이 남아있

어. 그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도 마법인가? '마땅찮은 이'는 까마귀 깃털같은 흑발이라고 들은 일이 있는데."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는 모양이야. 뭐, 괜찮아. 매력적인 눈동자와 은발이네." 

시즈는 상대가 말로 시간을 끌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로바메트는 이름만큼 뛰어난 정치가였

고 그의 혓바닥은 질 좋은 기름을 듬뿍 바른 듯 했다. 참지 못하고 넬피엘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당신이 내전을 멈춰주기를 바라고 있다. 내전은 국가에 있어서 소득이 없어. 서민들은 고통받고  국토는 피

폐해질 것이다. 지금 북쪽의 용병국은 벌써부터 군사를 움직이고 있어." 

"무슨 소리인가? 소득이 없다니. 이 내전은 반란이 주축이 된 것이네. 자네는 킬유시 공작에게 가서도  똑같은 소리

를 했는가? 그렇다면 내 아무 말하지 않지. 하지만 이와 같은 반란을 그냥 두면 왕권은 땅에 처박힐 것이다." 

"왕권은 나중에라도 세울 수 있지만 나라가 한 번 기울면 다시 일으키기는 힘듭니다. 왕권이 먼저입니까, 국가가 먼

저입니까?" 

"그래서 항복하는 말인가? 내가 항복하면 이 나라는 세기에 한 번씩은 왕권이 바뀔 거야. 혼란의 전장이 되버릴 테

지." 

로바메트는 흥분한 듯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시즈의, 어찌보면 감정이 없는  듯 투명한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유리눈동자가 그 시선을 피한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그는 목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정신을 끈

을 놓았다. 뒤에서 블리세미트가 손을 들고 서있었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다가는 밤을 새도 끝이 없겠네요. 우선 제 정신으로 되돌리고 얘기를 재개해보죠."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블리세미트는 기절한 공작을 파마리나의 지팡이에 걸쳤다. 둥둥 떠있는 마녀의 지팡이가 천천히 파마리나의 주문에 

따라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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