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8)
"크악! 이 놈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비명과 고함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시즈는 꽤나 멀리 떨어졌다고 할 수 있는 호수가에 아리에와 자리를 잡았지만
바람은 원하지도 않는 소리를 가져다주었다.
"아직도 들려?"
아리에는 안쓰러운 듯 시즈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지만 이런 때만큼은 그리 갖고 싶지 않았다. 고개
를 끄덕이며 시즈는 뒤로 돌아섰다.
"끝난 겁니까?"
"아직‥."
힘이 빠진 걸음으로 블리세미트가 다가와 시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암시에 걸린 게 아닌가요?"
시즈들의 판단이 틀렸나 싶어 아리에가 물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블리세미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정은
그리 다행스러워 보이지 않았지만.
"파마리나는 아무래도 암시는 걱정했던 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그를 스스로 암시로 몰아넣을 무언가가 있었겠군요."
시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암시, 또는 최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넬피엘 정도의
마도사라고 했다. 함께 다니면서 보았던 '불꽃의 춤을 추는 이'의 능력을 상기시킨 시즈는 끔찍했던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최면 주문을 받겠어?"
"그렇다면 협박의 요소가 있다는데 아리에도 의견을 공유하시겠군요."
"아마도. 내가 어떻게 뛰어난 성직자, 마법사, 마녀, 그리고 학자의 의견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겠어?"
문득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리에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돌멩이를 호수에 던졌다. 퐁당!
돌이 갈라놓았던 자리에 다시 물이 차며 서로 충돌하는 음색은 밤에 듣기에 제법 운치가 있었다. 그 운치에 휩쓸렸
는지 블리세미트도 덩달아 돌을 던졌다.
"그래서 암시를 풀 수 없다고 했습니까?"
"아니요. 파마리나는 적어도 넬피엘의 마력을 빌리면 얼마든지 풀 수 있다고 했어요. 다만 휴우증이 남아서 공작님
이 심한 두통을 느낄 거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협박의 원인만 제거하면 회복된다고 했어요."
시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마리나와 넬피엘은 손꼽히는 마법의 사용자들이었다. 게다가 교황을 압도하는 신
성력의 소유자, 그리고 용병국 서부 리스트에서 최고위를 달리던 자신과 아리에까지. 생각해보면 당해낼 자들이 없
는 무적의 멤버였다.
'그런 상대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역사의 고리. 이 단체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지금도 자신들은 그들의 술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시즈는 판단했다.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역사의 고리는 주
위의 모든 사건을 이용했다.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음유술사들과 그 동료들이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행사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물론 토루반과, 피브드닌이 있었지만 이 곳
은 실베니아지, 아스틴이 아니었다. 아스틴이었다해도 당해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역사의 고리가 미치
는 손길은 세일피어론아드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있다.
"파마리나, 어떻게 됐어요?"
아리에의 외침은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시즈의 상념에 파동을 일으켰다. 지친 얼굴을 하고 걸어오는 파마리나가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 아리에와 블리세미트는 저절로 손이 그녀를 부축했다.
손에 느껴진 그녀의 감촉은 그야말로 땀투성이. 암시를 풀기 위해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는 게 쉽게 느껴졌다.
"너 어서 가봐. 네가 할 일이 생겼어."
블리세미트의 손을 슬쩍 뿌리친 파마리나는 아직 넬피엘과 로바메트가 남아있는 나무집을 가리켰다. 할 일이 생겼
다는 말에 반색하며 순진한 사제가 달려가자 파마리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성직자와 마법사는 연구하고 신봉하
는 대상의 차이로 인해 끊이지 않고 다툼을 일삼았다. 파마리나는 마법의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성직자들을 쫓기도
했고 반대로 쫓기기도 했다. 아무리 블리세미트가 어리고 순진한 사제였지만, 또 '사막의 사제'들 자체가 마법을 배
타하지 않는다지만 거부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성직자들처럼 멸시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블리세미트의 특출한 신성력을 볼 때면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
는 경쟁심에 휩싸였다.
그렇기에 파마리나는 블리세미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넬피엘은요?"
"최면은 깨졌지만 마력을 사용해서 억지로 깬 거라 휴우증이 커. 게다가 상대의 마법이 워낙에 지독한 종류거든. 그
는 지금 붕괴되는 공작의 정신마저 마력으로 막고 있어."
"큰일이군요. 어서 가봐야겠어요."
"그만 둬. 그럴 필요가 눈꼽만큼도 없어. 넬피엘, 그 사람은 돋보기로 피부를 관찰하면 분명히 비늘이 있을 거야. 사
람의 모습을 한 용이 틀림없다고. 괴.물.이야."
넬피엘의 거대한 마력을 정면으로 맡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리 적의가 없다지만 그의 마력은 마치 폭염 같
았다. 파마리나는 몸 안에 힘이 넘쳐날수록 마력을 조절해야 하는 정신력이 태양에 다가간 양초처럼 줄어들었다.
'도대체 그의 정신력은 어느 정도인 거야?'
마녀로서 그녀는 상당한 정신수양을 쌓았다고 자신했었다. 적어도 자신의 나이 대에서는 천재라고 불렸다. 더욱 파
마리나를 할 말 없게 만드는 사실은 넬피엘은 그런 엄청난 마력을 쏟고도 지친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마녀 역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었으며 그녀들을 가리키
는 수식어는 많고도 많았다. 한 마디로 그 모든 표현을 해보자면 '특별'했다.
그러나 시즈 일행과 어울리면서 조금은 평범해졌다. 아니, 그녀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
'특별하다고 좋을 게 없지.'
보통 마녀의 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데 그녀가 그렇듯 그녀의 어머니 또한 뛰어난 마녀였다. 하지만 뛰어난 마
법과 주문도 아이를 키우는데 그리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진 못했다. 어머니의 마법은 빛의 향연으로 파마리나의 시
각을 즐겁게 해주는 게 전부였다.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천부적인 마녀의 핏줄도 싫증을 빨리 냈다. 어린 파
마리나는 초원에 나가서 또래들과 뛰어 놀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퀘퀘한 냄새로 가득한 지하
실뿐이었다. 그 곳에서 파마리나는 특.별.한. 마녀들의 물약을 만들고 특.별.한. 마녀들의 주문과 서적으로 세월을 보
냈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시즈들과 어울리면서 다른 이들과 같다는 평
범한 동질감이, 지난 세월의 특별한 나날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흐음‥."
파마리나는 진정한 괴물 중에 하나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즈를 물끄러미 보았다. 때묻지 않은 눈동자-겉모습으로
는-가 의아함을 담고 일렁이는 모습은 상당히 깨끗하게 느껴진다. 이런 눈동자를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괴물-젠티아, 넬피엘-들과 비교할 때 상대의 심장를 납작한 쥐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감은 없었다. 아니, 있기
는 했지만 그의 것은 포근하게 감싸안는 듯 했다.
레스난처럼 본능적인 감각이 발달되었다면 모르지만 외모와 분위기에 치중해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들은 시즈를 나
약한 청년 학자로 생각하리라.
갑자기 그가 얄미워졌다.
"도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엄청난 마나가 생기는 거야?"
"으으으으으!"
시즈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죽을상을 썼지만 볼을 잡아당기는 파마리나의 손은 조금도
사정을 봐줄 기미가 없었다.
우스꽝스럽게 늘어난 시즈의 볼. 아리에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파마리나는 무섭게 노려보는 아리에의 시선에, 투덜투덜거리더니 야유하는 시늉을 하며 시즈에게서 떨어졌다.
"쳇! 그냥 장난한 걸 가지고. 누가 연인 아니랄까봐. 우- 우-."
아리에는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장난인데 어떻게 이토록 검붉은 색이 나올 수가 있는가. 처음에 재밌다
고 웃어댔던 과거가 미안했는지 아리에는 시즈의 눈치를 보았다.
"시즈, 그리고 당신들. 들어와."
"주문을 완전히 파해했나요?"
"대충. 그런데 시즈 당신 얼굴이 잘 익었군. 조금만 더 익으면 시꺼멓게 썩지 않을까 싶어. 블리세미트, 여기 환자
한 명 추가다."
블리세미트는 휴우증으로 두통을 호소하는 로바메트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있었다. 볼이 시뻘겋게 부어있는 시즈를
보는 순간 그는 놀라서 당장 뛰어왔다.
"시즈,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치료나 해줘요."
한숨을 쉬며 시즈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