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00)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9)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문을 닫자 로바메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다 모였다. 이제 로바메트 당신이 스스로 최면을 받아드려야 했던 이유를 말해줄 차례야." 

"물론 말해주지. 그런데 정말로 다섯 명뿐인가?  너무하구먼‥. 이런 일을 맡았을 만큼  정예들이겠지만. 이 나라가 

아무리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다섯한테 지휘관을 납치 당하게 하다니 내 돌아가면 기사단 녀석들의 물 젖은 소

가죽 마냥 처진 군기를 바로 잡아주지. 이 녀석들을 그냥! 윽!" 

"공작 전하, 화를 내면 좋지 않습니다. 아직 전하의 휴우증은 건재합니다. 전 그저 고통을 완화시키는 게 전부에요." 

블리세미트의 손에서 푸른 청광이 은은하게 뿜어지자 통증에 얼굴을 점령되어가던 로바메트는 본래의 안색을 되찾

았다. 

"음, 그래. 조심하지. 고맙네. 그런데 자네의 신성력은 정말 맑은 푸른색인 걸. 신성력은 사제의 믿음과 덕에 따라서 

맑은 빛깔을 낸다던데‥ 아직 어린 친구가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로바메트는 공작이라는 작위가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이유는 충분했다. 자신의 체통없는 말투가 거북한 

듯한 표정을 짓는 다섯의 남녀가 가진 능력 때문이었다. 공작을 납치한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게다가 여행을 

가던 것도 아니고 저택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로바메트였다. 

지난 번, 암시를 걸었던 요사스런 소녀와는 상황이 틀렸다. 당시에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최면에 걸렸다고 

기억 자체가 달라지거나 없어지진 않았다. 다만 성격이 조금 변조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그의 호위조치는 지금 생각

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전시에 지휘관에 대한 호위는 그야말로 국왕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국왕과 전쟁에 투입된 이외의 기사단이 그 주

위에 몰려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작해야 20세 정도가 될 듯한 검은  복장의 여인이 최고령자로 생각되는 무

리는 자신을 납치하고도 그럴 듯한 상처하나 없었다. 

'이들이라면 날 도와줄 수 있다.' 

로바메트는 자신과 국가의 위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조력자들에 대한 기대가  엇갈렸던 것이다. 그게 이토록 흥분

해서 호들갑을 멈추지 않고 터져 나오는 이유였다. 

유리같이 투명한 눈동자의 시즈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납치가 아니라 구출이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즈의 어조는 딱딱했지만 목소리가 온화하고 나긋해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지. 그 전에 물을 것이 있어. 나를 구출하라는 것은 누구의 명령이지?" 

"젠티아 드로안 남작입니다." 

"값싼 남작. 그의 명령이란 말인가? 대단하군. 자네들 같은 수하를 두다니‥." 

"정정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다. 아니, 애원이 어울리겠군." 

검으면서도 붉은 빛깔을 은은하게 들어내는 머리카락의 소년이 대신 대답했다. 지난 번 성녀 일행에서 보았을 때와

는 다르게 무척이나 날카로운 눈매였다. 

"애원!? 값싼 남작이 애원?" 

머리통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작은 성직자 한 명도 대사제 급

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대사제만 하더라도 자신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의 신분인 걸 감안할 때 시즈 일

행 개개인의 신분은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했다. 

그렇기에 남작의 수하라면 자신의 말도 따를 공산이 크다고 좋아했던 로바메트는 적이 실망했다. 그런 마음을 달래

주듯 시즈에게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그의 부하가 아니거든요. 친구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죠." 

"친구라고? 분명 대륙을 뒤흔들던 학자, '마땅찮은 시즈'라면 '값싼 남작'과 어울리는 군."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시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용병일 뿐입니다. 이제 슬슬 말해주십시오. 전하를 최면에 빠지게 한 원인이 뭡니까? 이유가 없다면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로바메트는 대답을 하려 입을 열다말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고통이 이는 것이다. 그 모션에는 고통뿐이 아니

라, 고민의 의미도 섞여있었다. 

"내 아들이야.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이 그들에게 있네. 국가와 나를 놓고 비중을 두라면  당연히 국가를 선택했을 

거야. 하지만 자식 놈은‥ 그럴 수가 없더군.  혈육으로 협박을 당하자 이토록 무력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네. 다른 

생각없이 그 소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소녀?" 

시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역사의 고리 구성원에는  여자가 없었다. 바스티너는 갑옷을 벗을 리가 없었고 

또, 소녀라고 불릴 만큼 어린 여자는 더욱이 없었다. 넬피엘을 흘끔 바라보자 그 역시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적이 출현한 것을 걱정할 때 로바메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넬피엘." 

"남작이 애원했다고 했나? 나도 이렇게 애원하지. 제발 내 아들을 구해주게." 

실베니아 최고 귀족은 그렇게 바닥에 부릎을 꿇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머리를 땅에  댄 채로 시즈들의 말을 기다렸

다. 이 과격한 행위에 넬피엘조차 혀가 굳었는지 침묵했다. 

저벅. 

거의 무의식적으로 시즈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로바메트에게서 예전 헤트라임크와 같은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아

버지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운이었다. 

"일어서세요. 그러시지 않아도 저희가 구할 겁니다." 

시즈는 부드럽게 말하며 로바메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굴하다면 한없이 비굴하게 느껴질 행동을 했으면서도 일

어서는 로바메트의 눈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빛나고 있었다. 

2년 전, 시즈는 자신을 텔레포트 시킬 적의 헤트라임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의식도 혼미했지만 그보다는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양아버지도 저런 눈을 했었겠지.' 

시즈는 로바메트를 일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헤트라임크가 보고 싶었다. 

                                              * * *

"호호홋! 오라버니, 아― 하세요." 

"아―." 

덥썩! 냠냠 꿀꺽! 

"역시 내 동생이야. 간단한 수프 하나도 남들과 다르군." 

"과찬이에요. 오라버니." 

로진스는 괜히 문병 왔다고 내심 중얼거렸다. 소심한 그의 성격상 문병을 가지  않으면 노르벨이 섭섭해할 지도 모

른다는 불안감에 찾아왔건만. 병자 남매는 너무나도 대범했다. 즉 문병온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들의 세

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로진스가 조용히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수프가 바닥에 엎질러졌다. 

털썩! 

"끄으으윽! 아악!" 

노르벨은 어이가 없었다. 병자는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수프를 먹여주던 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가.  하지

만 대상이 아끼는 여동생이었기에 황당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에즈민! 무슨 일이냐? 로진스!" 

가장 질병과 약에 박식한 츠바틴은 실베니아 동북부로 모종의 협약을 위해 떠난  상태였다. 에즈민이 대답 대신 거

품을 물자 노르벨은 로진스를 마구 불러댔다. 마법사는 순수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박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문이 튕겼군." 

달려온 로진스가 황급히 에즈민을 일으켰다. 마법을 걸어 소녀의 몸 상태를 살펴본  그는 그녀의 마나가 완전히 흐

트러졌다는 걸 알았다. 

"무슨 뜻이오?" 

"주문이 더 강대한 힘의 영향으로 튕겨졌어." 

"날 바보로 아는 거요? 에즈민은 나한테 수프를 먹여주는 외의 행동은  없었소. 그렇다는 것은 전에 걸었던 주문이 

튕겼다는 말인데 이미 걸린 마법을 튕겨낼 정도의 마력을 가진 이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바보 취급을 받지." 

"뭣!?"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에즈민이었다. 새침한 표정을 짓으며 입가에  흘러내린 구토물을 닦아낸 그녀는 말

했다.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들이라면 주문을 튕겨내고도 남아요." 

"그런가?" 

노르벨은 마법과는 관련이 없었다. 때문에 음유술사들이 가진 마나가 얼마나 광대하고 거대한지 느낄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그들이 로바메트에게 접근했다는 걸 알겠군요." 

"음‥. 츠바틴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군. 역시 츠바틴 녀석은 대단해. 이런 미로의 계획을 짜다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마지막 암시가 남았잖아요!? 호호홋!" 

"하하하핫!" 

병실에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르벨이 중얼거렸다. 

"뭐, 뭐야 대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