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2)
복면을 한 그들이 자신에게 알아내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 파이얼 로바메
트 공작의 약점을 대라는 것이었다. 답 없는 질문을 해대는 그들에게 얼마나 어이없이 고문을 당해야 했는가.
'겉으로는 웃는 탈을 쓴 냉혈한한테 약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알았으면 얼른 말했을 거라고!'
어쨌거나 지금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어린 아이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마치 고문을 당하던 게
꿈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잠시 동안 파세닌은 정말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에라고 자신을 밝힌 여인은 꿈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방금 전에 머리를 감고 온 듯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가녀리게 덮었고 눈동자는 태초부터 가장 깨
끗하다는 유니콘의 혈정(血晶)처럼 맑은 붉은 색이었다. 흘러내린 검은 두발로 더욱 희어보이는 목덜미는 만지기만
해도 흰 빛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수건에 물이 마를 때마다 밖에 나가서 차가운 물로 적혀왔는데 파세닌은
힐끔 보았다. 그리고 만족했다. 그녀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었다. 키가 조금 작기는 했지만 한 팔에 잡힐 것 같은
허리는 오히려 불지도 않는 바람에 그녀를 흔들리게 한만큼 가냘퍼 보였다.
'크읏! 고문 끝에 낙이로구나! 이런 미녀를 보내주시다니. 레이모하여, 감사하나이다.'
속담마저 마음대로 바꿔버린 그의 머리에는 간호하는 여인과 환자와의 로망스가 둥둥 떠다녔다.
파세닌은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아픈 주제에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의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아리에라는 여인
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놀라서 달려올 것이다.
"어머! 안 되요. 아직 일어나면!"
하고. 예상대로 다가오자 그는 기분 좋게 아리에의 손길을 받으며 다시 누웠다.
"일어나셨군요. 로바메트 전하를 불러올게요."
파세닌은 보통 때 수도에서 여자들을 꼬실 때처럼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
려 하는 아리에의 손목을 잡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딴 노인네는 없어도 됩니다. 그저 우리 둘만‥켁!"
퍼억!
"뭐라고!? 이런 불효 막심한 놈을 보았나!!"
"허억∼! 아버지!"
"얼어죽을 아버지냐!? 언제는 그딴 노인네라더니!"
"아하하하‥. 아버지도 늙으셔서 벌써 귀가 어두워지신 모양입니다."
퍼억!
"오냐! 이렇게 어두워진 내 귀에 네 녀석의 '그딴 노인네'가 얼마나 명확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아버지, 난 환자에요."
로바메트는 아들의 걱정으로 안절부절했던 것이 뇌리에서 싸그리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환자라는 말에 씩씩거리며
내뻗던 주먹을 멈췄지만 파세닌을 갈아먹지 못해 안타까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말도 제대로 잊지 못
했다.
"게다가 널 구해준 아리에 양한테 대체 무슨 실례냐?"
"실례라뇨? 아버지께서 오해를 하시는 겁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가볍게 사귈 생각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아리에 양에게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쿠웩!"
"그게 실례가 아니고 뭐냐? 상대의 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아리에 양은 정인(情人)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교제 신
청을 하는 게 어딜 봐서 예의 있는 놈이 할 짓이란 말이더냐?"
"정인이 있든 말든, ‥자, 잠깐 뭐라고요? 정인? 정말입니까? 아리에."
아리에는 대답 대신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홍조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파세닌에게는 더 없이 절망스럽게 느껴
졌다. 실망한 아들을 보자 화낼 기운도 없는지 로바메트는 조용히 말했다.
"네 나이가 벌써 24살이다. 그만 하면 방탕한 생활도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
파세닌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진지한 아버지의 말에 그가 마음깊이 뉘우친다고 생각한 로바메트는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네 녀석도 제 자리를 잡아가는 구나.
하지만 파세닌의 시선은 아버지가 아니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 아리에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임자가 있다니‥ 이럴 수는 없어‥.'
로바메트는 아들의 눈물이 정말 진실한 슬픔의 눈물이라고 느꼈다.
그 날밤, 모닥불이 그려주는 불 그림자를 받으며 일행은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아직 건강을 되찾지 못한 파세닌은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본인도 나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절망에 빠진 듯 싶었다.
일행은 모두 그가 빨리 쾌차하기를 빌었다.
"전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는 우선은 다시 글로디프리아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 용병국에서 아마 글로디프리아를 압박하고 있었지?"
"어찌 됐던 간에 저희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도 우선은 글로디프리아로 가야할 것 같네. 자네들의 말대로라면 '역사의 고리'라는 녀석들은 내가 방해되었기에
죽일려고 했겠지. 그런데 내가 살아 돌아가면 날 그만 두겠나? 자네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놈들인데 군기빠진
기사들로는 상대할 수 없지. 그리고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머리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시즈를 비롯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모닥불의 불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넬피엘이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나 모르니 지금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귀찮은 눈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야. 로바메트 당신, 아들
도 그저 영양실조일 뿐이니까 뉘여서 가면 상관없겠지?"
"그러면 될 거요. 그럼 출발하기로 합시다."
공작은 파세닌을 데리러가면서 넬피엘을 힐끔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15세 정도로 보이는 연약한 소녀같은 얼굴이었
지만 그가 28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말로 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서는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공작인 자신이 그에게 반말을 들어도 거부감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런 시선을 알고 있는 넬피엘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가 불꽃을 가지고 논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로
서의 능력은 로바메트 공작으로 하여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곱상한 외모와 날카
로운 성격으로 인한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넬피엘이 고안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조차도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바로 파세닌 로바메트였다. 이 남자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온 순간 외마디 경악성을 냈다.
"앗!"
사람들은 모닥불 때문인지 그의 눈이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동자의 방향이 넬피엘에게로 향한 걸 알아
챈 순간 로바메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놈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를 주기 전에 파
세닌은 멀쩡한 사람-정신만 빼고-처럼 넬피엘에게 다가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짧았지만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소녀-라고 생각되는-는 아름다웠으니까. 커다란 눈
동자는 소녀가 얼마나 순수하게(?) 자라왔을지 파세닌은 가슴깊이 감동했다. 약간 어려 보이는 그를 망설이게 했지
만 약간만 더 키우면 충분한 것이다. 파세닌은 그가 장담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오‥ 레이디‥."
"난 남자야."
"예, 당신은 나‥암자‥."
그 말에 파세닌이 말을 더듬거렸고, 넬피엘은 서슴없이 그의 손을 끌어 자신의 사타구니에 가져다대고 씨익 웃었다.
"맞지?"
결정타였다‥.
파세닌은 충격으로 머리에 열을 대피며 며칠동안 끙끙 앓았다. 그는 가끔 넬피엘의 것을 만졌던 손등을 물어뜯으면
서 헛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내, 내 손은 저주받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