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1화
시즈들과 로바메트 일행이 글로디프리아로 막 마차를 몰기 시작할 무렵, 젠티아들은 이미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상
태였다.
"이제 슬슬 보이는 군. 검은 거인의 모습이‥."
보통 인간을 초월한 시력으로 거인의 두 어깨에 펄럭이는 드로안의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본 젠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그의 부하들은 글로디프리아를 잘 지켜낸 것이다.
"성에 연락을 해놓았죠?"
"슬슬 마중 나올 때가 되었어. 아! 저기 누가 오는 군."
젠티아는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사들이 잔뜩 마중을 나올 줄 알았는데 단
한 명, 집배원 복장의 소년이었다.
"아이킨? 아직 용병국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건가?"
헐레벌떡하여 달려온 아이킨은 말에서 내려 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 말을 타시고 포시킨으로 가십시오. 마크렌서 자작이 각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차는 제가 몰고 갈 테니, 어
서!"
"데린! 먼저 성에‥."
"다녀와요, 젠티아. 먼저 가서 목욕물 데워 놓을 게요."
마중을 받아야할 때 배웅을 받게 된 젠티아는 아이킨이 말할 포시킨으로 향했다. 포시킨은 글로디프리아의 정면에
있는 산턱으로 펴온 성을 감싸고 있는 롤크 산에서 뻗어나온 한 줄기였다. 포시킨을 확보했다면 용병국의 군대가
그의 영지 깊숙이 들어왔다고 봐도 좋았다. 젠티아가 마크렌서 자작의 진영에 막 도착했을 때 기사들과 군사들은
이미 전쟁터로 나간 상태였다. 아마도 포시킨 중간의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적과 맞붙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짜
고짜 기사들이 회의하는 막사로 들어갔다.
"토클레우스! 전쟁 상황을 보고 하도록!"
"각하!"
그의 모습에 기사들이 벌떡 일어섰다. 대부분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러 나간 터라 안에는 몇 명의 참모격 기사들 밖
에 없었다. 연락을 받은 마크렌서 자작이 만면에 놀라움과 기쁨을 띄고 달려왔다.
"오, 레이모하여‥ 그대는 우리를 버리지 않는 군요. 각하, 조금 늦었지만 잘 오셨습니다. 당장 갑옷을 입고 적들에
게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얼굴을? 토클레우스, 우선 전쟁 상황부터‥."
"어서요! 이봐! 빨리 갑옷 준비해와!"
"자, 잠깐!? 전쟁상황을‥."
마크렌서 자작은 상관의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 인형놀이 하듯 젠티아에게 갑옷을 입혔다. 이유도 모른 체 그에게
떠밀려 군사들 앞에 섰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명, 두 명‥ 젠티아의 얼굴을 보자 점점
군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앗!"
마크렌서 자작이 그 함성의 뒤를 이어서 외쳤다.
"다들, 불안했을 것이다! 한 마디만 하겠다. 모두 각하의 계략이다!"
"우와아아아앗!"
"각하, 검을 들어주십시오. 전장에 있는 백 장의 꽃잎들에게‥ 아니 백 한 장의 꽃잎들에게 힘을 줘야 합니다."
젠티아는 백 명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낼 때처럼 검에 기운을 가했다. 웅―하는 소리와 함께 성음검 특유의 울림
이 강하게 하늘로 퍼졌다.
보통 진영은 군사들이 싸우는 상황을 보기 쉽게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잠시 싸움을 멈춘 양측의 군사들이 햇빛을 받
아 반짝이는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소리도 들었다. 때를 맞춰 토클레우스 자작이 깃발을 든 군사들에게 기를 흔들
라고 소리쳤다.
"공격이다!"
계획이 되어있었는지 구릉에 숨어있던 글로디프리아의 군대가 양옆에서 카로안의 군사들에게 몰려들었다.
"협공이다! '값싼 남작'의 계략이었어. 퇴각! 퇴각하라!"
젠티아는 잠시 용병국의 기사들이 그토록 겁쟁이였나 생각해보았다. 그의 기억에 그들은 협공을 당한다고 물러설
군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자신과 몇 번이나 싸운 이들이 아닌가. 설마 자신의 얼굴을 봤다고 물러가겠는가?
'토클레우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리둥절한 심정에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크렌서 자작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크렌서 자작은 모른
척 무시했다.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며 그는 외쳤다.
"총공격이다! 검을 들고 이 땅을 밟은 자의 최후를!"
"최후를!"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글로디프리아군. 그들의 뒤를 따라 가는 젠티아에게 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값싼 남작인가?"
"카로안의 국왕 폐하시군요."
"이번엔 진짜군. 일부러 가짜를 세워서 끌어드리다니‥ 이번에는 내가 졌네."
"네?"
"모른 척해도 이제와 무슨 소용이 있으리! 하지만 다음 번에는 이 치욕을 꼭 갚아주겠네!"
카로안군은 패배했다. 실베니아 국경 밖으로 멀리 물러나서 다시 국경을 넘보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은 모르지만 젠티아에게는 너무도 싱거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얼굴 보여주고
군사들 뒤를 따라간 게 전부였다. 그가 막사 안에서 승전보고를 받고 있을 때 한 기사가 터벅터벅 들어왔다. 격전을
치렀는지 갑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그를 보고 젠티아는 벌떡 일어섰다.
"보를레스! 그건 내 갑옷이잖아? 내가 가장 아끼는 걸."
오랜만에 본 주제에 대끔 하는 소리가 갑옷타령이라니.
'이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니까.'하고 웃으며 보를레스는 갑옷을 벗었다. 하나를 벗고 뒤집을 때마다 땀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주르륵 쏟아지는 그의 국물에 젠티아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돼, 됐어. 그냥 자네 주지."
"감사합니다."
보를레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 동안 동고동락했던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젠티아는 깨끗하게 썼을지 모르지만 그가
사용하는 동안 갑옷은 이 곳 저 곳 찌그러지고 흠집이 가득해졌다. 한 달 정도만에 애인에게 정을 쏟듯 마음을 빼
앗겨버린 것이다.
"고생했나보군."
"예, 보를레스가 가장 고생했지요. 정말 죽을 고생이었을 겁니다."
"하하‥. 대단하군. 무슨 일이었는데?"
"각하를 흉내냈죠."
"그게 죽을 고생할 정도의 일이야?"
"정상이 비정상을 흉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농담입니다."
마크렌서 자작은 명백하게 젠티아를 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젠티아는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를 정상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기껏해야 데린 킬유시 정도였다. 얼굴이 굳은 젠티아에게 마크렌서는 보를레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 친구가 자크 왕을 거의 삼십 여분이나 상대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자크 왕을?"
자크는 카로안의 국왕으로 대륙 3대 검사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지금쯤 열심히 꽁무리를 빼고 있을 그를 생각
하며 젠티아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를레스를 주목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하·하·하! 물론이죠, 각하.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신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게다가 한 달 전에는 남작
부인께서도‥."
마크렌서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떠오르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젠티아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느꼈지만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억지로 활기차게 말했다.
"그, 그래! 보를레스가 많은 활약을 했어. 오늘 저녁식사 때 좀더 자세하게 말해주게. 피곤할 텐데 다들 쉬어야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등을 돌리는 젠티아를 보며 보를레스와 마크렌서 자작은 회심의 미소를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