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2화
얘기를 시작한 것은 멜첼이었다. 그의 입에서 술술 과거의 일들이 다시 흘러나오자 보를레스는 흠칫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멜첼이 얼마나 보를레스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보를레스는 기본이 잘 되어 있는 검사입니다. 남작님처럼 화려한 검기(劍技)보다는 철저한 훈련으로 완벽한 서해검
격을 다지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보를레스는 확연히 달라졌다. 검을 2초동안 검을 9번 휘둘렀고 단번에 휘두를 때는 1초에 5~6번
휘둘렀다. 사실 그는 엘시크의 궁정기사들도 인정하는 검술의 소유자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육체적인 재능이 있는
보를레스는 금방 뛰어난 실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재능을 키울 기간은 다른 기사들보다 훨씬 적었다. 산적, 용병
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의 장점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크호도 보를레스의 장단점을 집
어낼만큼 큰 차이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의 검술은 향상된다기보다는 다양해졌다. 그런데 글로디프리아에는
그의 검술을 고쳐줄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멜첼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멜첼은 예전에 보를레스와 시즈가 검을 나누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동방검법의 이해로 그는 동작을 끊김없이
이어갔지만 멜첼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무조건 동작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동방검법도 무조건 부드럽지 않다. 동방인들의 검이 빠를
때는 번개보다도 빠르지. 너 역시 빠르다. 네가 제대로 검을 내리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야. 그런
데 동작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힘을 억지로 줄이다니 바보짓이다.
시즈님이 아무리 성약을 먹고 힘이 대단해졌다지만 검술에 있어서 한 팔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구나 다름
없다. 내가 시즈를 상대했다면 1분 이내로 제압했을 거다."
보를레스는 처음에는 멜첼이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과장해 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변화했다. 그 시작은 우선 자신이 변하면서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를레스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
다. 1초에 2번을 휘두르며 힘겨워했던 보를레스는 2초에 9번을 휘두르면서 30분을 견뎌냈다. 반시간, 그 안에 상대
는 16000여 번의 검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 원리는 힘의 배분에 있었다. 메트로놈이 초마다 딸깍거리는 소리에 맞
춰서 그의 검은 잠시 쉬었다가 폭발적으로 내리그어졌다. 이런 그도 '값싼 남작'의 기사단, 백 장의 꽃잎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크읏!"
"수고하셨습니다."
저녁만 되면 손톱만큼 얇아진 달의 끝 부분처럼 뾰족한 검 끝이 보를레스의 턱을 간질였다. 패자는 이유를 모르겠
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명히 검의 속도는 자신이 빨랐지만 상대는 가볍게 그의 검이 이어질 방향을 끊어버
렸다. 멜첼은 동방검법에서처럼 힘을 줄이지 말라고 했지만 보를레스는 그러지 않고는 이기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그게 앞으로 네가 풀어야할 과제다. 힌트는 이미 수없이 주었다."라고 멜첼은 웃었다.
보를레스가 검술에 대한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크렌서 자작도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에 비하면 보를레스의 고민은 속 편한 것이라 말해도 좋았다.
"카로안군이 공격한 시기는 너무도 적절해‥. 아무리 내란의 시기라지만 남작께서 아직 성에 남아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카로안군이었다면 반란군으로 인해 다급한 실베니아 중앙에서 각하를 불렀을 때 공격했을 거야."
책상에는 젠티아가 여행-이라고 마크렌서는 생각했다.-을 떠남으로 해서 넘겨진 수많은 서류들이 차곡히 쌓여 처리
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서류처리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구
겨져 나뒹구는 종이도 많았다.
탕! 마크렌서 자작은 가볍게 책상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화가 난다고 새게 두들겼다가 부서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
다.
"역시 카로운군은 남작님의 부재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침 일찍 피브드닌과 얘기해봐야겠어."
책상 앞의 창문을 열자 금색 달빛이 쏟아져 들었다. 그는 달빛을 맞으며 보기만 해도 나른하게 기지개를 폈다.
"끄으으으으!"
콰당! 기사가 기지개를 펴다가 의지와 함께 넘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마크렌서 자작의 정신
체계는 혹사당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내라도 있으면 창문을 닫고 이불을 덮어줄 텐데‥. 노총각은 서러운 것이다.
"푸에―취!"
"자작, 괜찮소? 감기가 심하게 들린 모양이구려?"
"어젯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바람에‥."
"저런. 여름이 되려면 아직도 한 달은 남았습니다. 시간을 내서 토플레에게 가보시오."
"그래야겠소. 콜록! 콜록! 그보다 어서 계속 하시오."
피브드닌은 안쓰러운 듯 혀를 찼다. 마크렌서는 피브드닌을 재촉하며 다섯 번째 손수건을 꺼냈다. 그래도 자연스럽
게 어울리는 게 그 동안 꽤나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자작의 생각대로 카로안군은 남작님이 안 계시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신뢰하지는 않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벌써
밀고 들어왔겠지. 아마도 정보 수집의 출처가 정상적이지 않은 모양이오."
"그 말은 보를레스가 각하의 흉내를 제대로만 내준다면?"
"의외로 이 전쟁은 쉽게 끝날지도 모르오."
마크렌서 자작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아마도 보를레스는 벌썩 연병장을 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군요. 그런데 부탁한 것은 다 됐소?"
"지금 토루반이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아!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예전부터 우리에게 협력하는 뛰어난 마법사가 한 분 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