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5화
일주일간 적군을 포획하면서 보를레스의 '도둑발'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다리의 빠르기가 그를 가르치던 거리 춤
꾼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수를 연발할 정도가 되어있었다. 보를레스가 '도둑발'을 완성한 의미는 컸다. 기사로서
만약 실패하거나 벌이가 시원치 않을 경우, 부업을 가질 수 있는 밑천을 마련했다는 뜻도 됐다.
그런 부소득(?)과 상관없이 보를레스는 카로안 병사를 잡아오는 임무에 재미를 붙였다. 카로안 진영에서 자신에 대
한 소문이 멋지게 퍼진 것을 알게 이후로는 마치 귀신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끌려온 카로안 병사
는 고문을 받는 대신 검술 연구로 심혈을 불태우는 보를레스의 연습상대가 되어야 했다. 일종의 인간 샌드백. 나무
검은 들었지만 빗발처럼 쏟아지는 보를레스의 검을 막는다는 것은 검술에 뛰어난 조예가 없는 그들로서는 무리였
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공격을 해보는 보를레스의 연구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애를 쓰며 도와주는 모습
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생체실험의 잔인도에 맞먹는 이 연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시간 정도면‥.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겠습니다. 그만 해주십시오."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
오히려 보를레스가 진심으로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강한 기사들만 상대해서 깨닫기 힘들었던 그의 장점들
이 나약한(?) 연습상대를 구타해대면서 조금씩 깨우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윽! 흐어어어엉∼."
하지만 포로가 울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겠다. '남자가 꼴사납게!'라는 둥의 말로 달래려 했지만 포로들
은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었다. 더 이상 맞아서 불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쳇! 할 수 없지. 내일은 좀더 맷집이 있는 녀석으로 잡아오는 수밖에."
구타가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자 포로는 천천히 정신을 잃어갔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 비치는 사내는 카로안 진영
에 나도는 소문의 악마가 투덜대고 있었다.
포로들을 구타하면서 보를르스는 인간이 무의식중에 규칙을 만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떤 존
재나 동작에서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신나게 맞던 연습상대가 어느 순간부터 한 둘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전투에 익숙한 기사들이라면 순간적으로 공격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이 너무나 쉽게 그의 검을 막아내던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하
며 전투에서 싸우던 일을 떠올린 보를레스는 그 또한 상대의 공격을 타이밍을 찾아서 끊을 때가 있었음을 상기하고
흥분했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또다른 고민에 빠져버렸다. 실마리는 찾았으니 해결방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위에서 인간이 만든
다는 규칙은 타이밍, 리듬이다. 막무가내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생각 없는 공격은 효율도 없었고 숙련된 검사들한
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검술이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만의 규칙이면서 남들은 타이밍을 잡아내기 힘든 리듬을 찾
아야 했다.
그렇기에 보를레스는 새로운 연습상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좀 튼튼한 놈으로‥.'
위의 중얼거림 같은 포로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정말로 필요할 때 얻기 힘들다.'라는 말처럼 카로안 진영은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져 있었다.
소문이 지휘관의 귀에 들어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보를레스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빠르게 돌아가며
방어가 소홀할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가 와있는 것을 아는지 카로안 병사들은 오늘은 또 누가 끌려갈지 혹시
나 대상이 될까봐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손에 든 수프가 제대로 목으로 넘어갈까 심히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쓸만한 녀석은 진영 중심에 있을 텐데 너무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단 말이야‥."
네 발 짐승처럼 양손을 땅에 대고 그는 치즈를 향해 달려가는 생쥐같았다. 하지만 생쥐들은 치즈를 가지러 가기 전
에 주위를 살펴본다. 보를레스는 '도둑발'을 이용해서 단숨에 나무를 기어올랐다. 덩치는 곰만한 주제에 쥐새끼 흉
내를 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에게 있어서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용병으로 숲에서 싸울 때 주위 관찰
을 게을리 하면 주어지는 것은 죽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좋은 습관은 혹시나 있을 실수를 줄인다. 독수리처럼 카로안 군의 경비 상태를 살펴보던 보를레스의 눈이 흥미로움
으로 빛을 발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이다. 균일하게 퍼져있는 경비병들이 어느 시점에 있어서는 '일부러'
라고 느껴질 만큼 부자연스럽게 들어가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보를레스가 몇 명의 포로를 포획한 지점이었
다. 그 곳에는 슬쩍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사내들이 긴장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고 서 있었다.
'함정이네. 속셈이 뻔히 보인다, 보여!'
"흐흐흐‥."
보를레스는 카로안 군을 골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늦봄,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갈 시간. 푸른 하늘이지만 서서히 윤곽을 보이는 백색의 달이 곧 있을 밤의 방문을 알리
고 있었다.
'어서 와라‥.'
이시므는 손에 닿는 위치에 검을 내려놓고 털썩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용병왕의 150여 명의 시위 중에
약한 축에 속했다. 체격이 작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체의 우세가 승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얕볼 사람이 아니었다. 국민의 16% 가량이 용병인 카로안국, 그 안에서 국
왕의 시위라는 것은 날고 긴다는 수많은 용병들 가운데서도 한 차원 높은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일 것이다.'라고 이시므는 흉수의 생각을 예측했다. 이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위에서 말했다
시피 다른 함정을 맡고 있는 자들에 비해서 가장 작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무에 기대앉은 것은 먼저 흉수를 유인하
려는 생각에서였다. 입은 불침번을 서는 평범한 병사들처럼 피곤에 지친 한숨을 내뱉었지만 정신은 언제일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 칼끝처럼 곤두섰다.
투르륵! 무언가로 인해 돌이 움직이는 소리. 이시므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벌써 다리는 약간 구브러진 채 상대
의 선공을 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드디어 왔구나! 어디냐?'
휘익―! 파공성이 귓가에 스쳤다. 황급히 몸을 굴렸다. 그러나 피했다고 생각하며 일어선 순간, 그의 다리에 퍽! 하
고 충격을 주었다.
'돌멩이‥?'
의아했다. 암기 종류였다면 그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물론 돌멩이도 충분히 암기라 말할 수 있었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쇠붙이들과는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우선 속도가 달랐다. 그 차이는 미세했지만 뛰어난 어
쌔신이나 검사들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결정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
단도만 하더라도 날카로워 공기저항이 적고 검신 끝부분에 무게중심이 실려있어 방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피하기 힘
들었다. 아니, 파공성이 적어 피할 생각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암기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어긋난다. 적어도 단검류 정도는 전쟁에서 잠입 및 정찰에 기본적으로 구비되는 게 상식이었
다. 당연히 있어야할 무기가 없다면 군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암기
가 아닌 돌멩이를 주워던진 이유는? 답을 추리해감에 따라서 이시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결론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날 놀리는 건가?"
실력있는 용병들은 자존심이 대단하다. 상대의 유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자존심이 상하다못해 썩
는 느낌이었다. 용병왕을 따라서 전장을 쏘다닌 지 수 년, 이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한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모두 그의 검을 맞고 땅 속 깊이 묻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불타는 눈동자가 돌이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