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00)

                                            41악장 6화

'어서 와라‥.' 

이시므는 손에 닿는 위치에 검을 내려놓고 털썩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용병왕의 150여 명의 시위 중에 

약한 축에 속했다. 체격이 작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체의 우세가 승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얕볼 사람이 아니었다. 국민의  16% 가량이 용병인 카로안국, 그 안에서 국

왕의 시위라는 것은 날고 긴다는 수많은 용병들 가운데서도 한 차원 높은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일 것이다.'라고 이시므는 흉수의 생각을 예측했다. 이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위에서 말했다

시피 다른 함정을 맡고 있는 자들에 비해서 가장 작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무에  기대앉은 것은 먼저 흉수를 유인하

려는 생각에서였다. 입은 불침번을 서는 평범한 병사들처럼 피곤에 지친  한숨을 내뱉었지만 정신은 언제일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 칼끝처럼 곤두섰다. 

투르륵! 무언가로 인해 돌이 움직이는 소리. 이시므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벌써 다리는 약간 구브러진 채 상대

의 선공을 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드디어 왔구나! 어디냐?' 

휘익―! 파공성이 귓가에 스쳤다. 황급히 몸을 굴렸다. 그러나 피했다고 생각하며 일어선 순간, 그의  다리에 퍽! 하

고 충격을 주었다. 

'돌멩이‥?' 

의아했다. 암기 종류였다면 그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물론  돌멩이도 충분히 암기라 말할 수 있었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쇠붙이들과는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우선 속도가 달랐다. 그 차이는 미세했지만 뛰어난 어

쌔신이나 검사들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결정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 

단도만 하더라도 날카로워 공기저항이 적고 검신 끝부분에 무게중심이 실려있어 방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피하기 힘

들었다. 아니, 파공성이 적어 피할 생각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암기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어긋난다. 적어도 단검류 정도는 전쟁에서 잠입 및 정찰에 기본적으로 구비되는 게 상식이었

다. 당연히 있어야할 무기가 없다면 군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암기

가 아닌 돌멩이를 주워던진 이유는? 답을  추리해감에 따라서 이시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결론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날 놀리는 건가?" 

실력있는 용병들은 자존심이 대단하다. 상대의 유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자존심이 상하다못해 썩

는 느낌이었다. 용병왕을 따라서 전장을 쏘다닌 지 수 년, 이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한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모두 그의 검을 맞고 땅 속 깊이 묻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불타는 눈동자가 돌이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 

"거기냐?" 

숨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이시므는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의 보를레스를 유인하려 했던 냉정함을 유지했더라면 자신

의 위치는 드러났지만 아직 상대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는 그가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쉭―! 퍽! 정강이에 날아온 돌이 아픔을 선사하자 그나마 있던 이성은 산산조각났다. 

"흐아아아압!" 

보를레스는 돌 몇 대 맞았다고 광분해서 고함을 질러대는 이시므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놀리는 건가라니‥. 어떻게 내 배려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보를레스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그의 입장에서는 보다 싱싱한(?) 포획물을 원했던 것이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약간의 타격을 주면 상대를 심적으로 궁지에 몰아 기습할  계획이었다. 뭐 과정은 어떻든 무슨 

소용인가? 이시므는 보를레스의 예상을 깨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흥분은 보를레스의 검을 막는데 

불리(不利)한 조건이 될 것이다. 보를레스가 원했던 결과였다. 

보를레스에게 부담스러운 보초병들도 숲 속 깊이까지는 쫓아오지 못한다. 진영을 지켜야 되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포획 대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시므는 진영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도망가던 보를레스가 그의 다

리가 멈칫거린다 싶으면 뒤돌아서 돌을 던져댔던 것이다. 

'이 정도면 됐어.' 

"이봐, 너무 흥분한 거 아니야?" 

카로안 진영에서 충분히 멀어졌음을 확인하자 보를레스는 도망을 멈추고 대끔 한 마디를 뱉었다. 

"네 놈을 잡아가 포상을 두둑하게 받을 거라 생각하니 기쁨에 흥분이 멈추질 않는다." 

이시므는 뒤늦게 이탈을 깨달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혼자 대적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변태냐? 하긴‥ 나도 네 녀석을 잡아가서‥ 므흐흐흐." 

보를레스는 '두들겨 패고 놀 것을 생각하면'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하지만 이시므는 방금 전의 소름끼치는 웃음만으

로도 보를레스가 막강한 사내임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끌려간 병사들이 불쌍해졌다. 

"어디 해봐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를레스가 그의 정면에  육박했다. 거구임에도 속도는 병사들 사이에  괴물이라고 소문나기 

충분할 만큼 빨랐다. 이 정도로 어두운 숲 속에서 움직인다면 어지간한 동체시력이 아닌 한은 흐릿한 잔영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내미는 만곡도에 보를레스는 공격을 다급히 멈췄다. 정확하게 목줄기를  향하고 있는 공격은 어린아이의 손

에 들린 것 같았지만 그가 공격을 하는 타이밍보다 한 치 앞서있었다.  이시므는 보를레스가 거구이며 속도가 빠르

다는 것만으로 방향과 동작을 바꾸기 어렵다는 단점을 순간적으로 발견할 것이다. 

이시므의 추측은 가벼운 찌르기였고 보를레스는 난감했다. 피할 수는 있었다. 상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

해서는 속도를 내며 준비했던 위력적인 검격은 포기해야했다. 

한 편, 이시므의 만곡도에 담긴 의미는 공격이 아니라 견제였고 보를레스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것만으로 그의 찌르

기는 성공이었다. 그럴 바에야 보를레스는 반격하지 않고 찌르기를 피하는데 초점을 조정했다. 

그러나 그 또한 오산이었다. 다음 순간 만곡도의 움직임이 빠르게 변화했던 것이다. 이시므가 목을 찌르기 위해 옆

으로 누웠던 날을 아래로 향하며 빛살처럼 내리그었다. 

"크윽!" 

"얕았군. 하지만 다음에도 피할 수 있을까?" 

보를레스의 상의는 금새 피로 물들었다. 옆구리 부근의 가죽만 베었지만 피가 보인다는 사실로도 두 대결자의 기세

는 확연히 달라진다. 그는 지금 이시므의 기세에 완전히 몰리고  있었다. 그래도 천운이 따라준 상황이다. 만약 '도

둑발'을 익히지 않았다면 벌써 이시므는 흉수의 목을 베어들고 진영으로 돌아갔을 테고 남은 몸뚱이는 까마귀밥 신

세가 되는 미래가 펼쳐졌을 것이다. 

'돌아가면 멜첼에게 감사의 술 한잔이라도 건네야 겠는 걸‥.'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처음 공격의 맥을 가볍게  끊어놓는 수법으로도 오늘의 포획 대

상은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챙! 

"왜 그러지? 방금 전까지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갔나?" 

용병의 검술에는 동방검법의 흐름이 섞여있다. 이시므의 느렸다가 빨라지는 공격은 그와 궤를 같이 했다. 

"핫!" 

이시므가 다시 만곡도를 찔렀다. 이번에는 아주 빨랐다. 심혈을 기울여서  막으려는 보를레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헉!"하고 보를레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의 만곡도가 갑자기 느려진 것이다. 그가 당황할 때 만곡도가 파공성을 

내며 쏘아졌다. 

"으윽!" 

"잘 피하는 걸. 이미 도망칠 때 알아봤지만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군." 

이번에도 도둑발의 도움으로 겨우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곤란했다. 타이밍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

록 자잘한 상처는 많아졌고 옆구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오늘은 일진이 나쁜 걸‥." 

보를레스는 아마도 가슴에 구멍이 잔뜩 났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서  이시므는 지금까지 정강이에 돌을 맞아 

멍이 든 게 전부였다. 천천히 보를레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야 하지?' 

고민을 하던 보를레스의 허리를 이시므가 베어왔다. 검을 막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만곡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허리에

서 다리로. 가까스로 피한 보를레스, 뇌리에 멜첼의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힌트는 수없이 주었다. 

'혹시‥. 어쩌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을 실험해보기에 이시므는 매우 적당한 상대였다. 오히려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처음 선공을 했을 때처럼 거구가 맹수처럼 돌진했다. 

이시므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공격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면서 치명타는 요리조리 피하는 보를레스의 움직임

에 이제는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격을 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상대를 처리하는데 그의 검법은 안성맞춤

이었다. 

"크하하핫! 자포자기 한 거냐? 이번에는 피하게 두지 않겠다!" 

샥! 섬광 같은 찌르기. 보를레스는 망설였다. 이시므의 검에는 견제가 아닌 살기가 담겨있었다. 

'지지 않는다!' 

상대의 검을 묶어두려는 듯 보를레스의 동공이 커졌다. 만곡도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 잠깐! 다시 말해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멜첼과 기분좋게 다과를 나누고 있던 마크렌서 자작의 얼굴이 씹고 있던 사과에 이빨 자국  나

듯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카로안 진영에 심어두었던 밀정에게서의 연락  때문이었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서 멜첼에

게 소리를 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함정이라니!? 보를레스에 대해서는 걱정없다고 했지 않았나!" 

"설마 이렇게 빨리 대처를 할 줄은‥." 

퍽! 

"아‥욱!" 

"당장 뛰어가! 가서 구해오라고. 그를 잃어버렸다가는 남작 각하를 볼 면목이 없어진다. 그리고 시즈님에게도!" 

멜첼은 마크렌서 자작이 던진 책 모서리에 얻어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황급히 뛰었다.  자신의 검을 챙길 시간도 없

었다. 그는 달려가며 성의 보초병 무기를 강탈했다. 

"다녀와서 돌려주겠다!" 

"그럼 전 뭘로 성을 지킵니까?" 

"높은 의기와 정신으로!" 

멜첼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진 후 그 병사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투덜거렸다. 

"그랬다간 칼 맞아죽기 쉽상입니다." 

성을 벗어난 멜첼은 조금도 쉬지 않고 카로안군의 진영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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