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7화
"무사한 건가? 헉, 헉!"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멜첼.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뛰어오다니 무사하오?"
보를레스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는 이미 멜첼이 뒤늦게 달려온 이유가 카로안 군의 함정에 대한 정보 때문임을
'무사한 건가.'라는 한 마디로 알아챈 상태였다.
"마크렌서 자작의 명령으로 왔을 뿐이야.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멜첼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걱정이 되어서' 뛰어왔다고 하면 정말 남사스러울 것이다. 그 표정이 어색해서 보를레
승게는 우스꼬아스럽게만 느껴졌다. 웃음을 참고 있는 보를레스에게 멜첼은 애써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 포획물인가?"
"으음, 튼튼한 놈으로 골랐지. 모두, 그대 덕분이야. 힌트를 알아챘거든. 아슬아슬했어."
'위험했다는 소리로군.'
멜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척 보기에도 보를레스의 상의는 완전히 피로 염색을 한 상태였다. 특히 옆구
리의 상처는 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느껴졌다. 멜첼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 .
"왜 지혈하지 않았지?"
"그럴 시간이 없었어. 그나저나 멜첼, 부탁 좀 합시다."
"뭘!?"
대답 대신 보를레스는 털썩 쓰러졌다. 살펴보니 기절해있었다. 멜첼의 등뒤로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토플레로부터 출혈과다라는 판명을 받은 보를레스가 깨어난 시간은 2일 후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무엇보다 포획
물을 확인했다.
"이번 포획물은 잘 있습니까?"
"잘 먹여놓았네. 멜첼이 말하길 자네가 더 이상 자신에게 훈련받을 필요가 있는지 알려줄 중요한 실험 대상이라더
군."
"으샤!"
보를레스는 몸을 일으켰다. 출혈과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소보다 가뿐한 것이 치료마법이 행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관절을 슬슬 털고 비틀어보며 상태를 점검해본 보를레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럼 보여드리죠."
"자네, 이시므라고 했지?"
"그렇소."
연병장으로 끌려나온 이시므. 그는 초긴장상태였다. 보통 이런 확 트인 공간에서 포승줄을 풀어줄 때는 도망가게 하
고 뒤에서 화살을 마구 쏴서 누구의 활이 제대로 맞았냐는 둥의 내기 놀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얗게 질려있는 이시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마크렌서 자작은 웃으며 긴 막대기 여러 개를 모아 묶어둔 뭉치를
던졌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시므에게 말했다.
"그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고르게. 상대의 나무칼이 좋아서 졌다는 말을 하지말고."
"무슨 뜻이오?"
"자네를 잡아온 사내와 목검 대련을 시키겠어. 그를 이긴다면 풀어 주겠네."
'정말인가?'하고 이시므는 생각했다. 기껏 잡아온 포로에게 기회를 주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손해볼 것은
없었음으로 그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나무 막대기를 골랐다.
"보를레스, 자네도 골라."
보를레스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었다. 기사들이 정정당당한 대결이 있도록 다 비슷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두 사람이 나무 검을 들고 마주서자 기사들이 긴장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이어이! 시작해라!"
"보를레스, 가볍게 끝내버리라고!"
이시므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번 숲에서 보를레스에게 당한 것은
순전히 방심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본래 실력을 숨겨 두었을지도‥.'
그의 뇌리에 잠시 그 때의 기억이 지나쳤다.
"크아아앗!"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만곡도의 칼날이 휘릭하고 돌았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휘청!
보를레스가 돌에 걸렸는지 비틀거린 것이다. 이시므는 입을 쩍 벌리고 허공을 지나가는 자신의 검을 지켜보았다. 그
리고 그의 복부에 보를레스가 넘어지면서 내지른 주먹이 꽂혔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
분명히 이 몸집만 큰 사내는 당시의 승리를 실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므는 보를레스를 노려보면서 입
을 열었다.
"정말로 이 자를 쓰러뜨린다면‥."
"내 이름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다. 글로디프리아의 영예로운 기사다."
그의 말에는 글로디프리아의 명예를 걸겠다는 약속의 뜻도 있었지만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그토록 영예롭다고
자부하는 의미도 있었다.
"어쨌든‥ 좋다!"
이시므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보를레스가 신중하게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 막아내고 찌르기를 시도했고 이시므는
만세하듯 팔을 들며 피했다. 그리고 검을 정면으로 내밀어 빠르게 돌진하려는 보를레스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보통 기사들의 대련 시에 사용되는 목검은 기름에 끊인 나무로 만든다. 그래야 질겨서 도중에 부러지는 사고가 없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쇠덩이인 진검보다는 단단하지 않아서 두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검을 부딪히지 않았
다. 상대의 검이 부러진다면 모르지만 자신의 검이 부러지는 게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될 수 있는 한'이었다. 둘은 진검 승부나 다름없는 결투를 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도 필요했던 것이
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갈색 줄기. 이시므는 결국 목검을 들어 막았다.
딱!
"공격하지 않아서는 날 이길 수 없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보를레스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이시므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공격
을 피하면서 보를레스의 움직임을 숲에서와 비교하고 있었다. 자신의 패배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보를레스가 실력
을 숨겼던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이시므는 정면으로 돌진했다. 숲에서 보를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강하게 검끝을 찔렀다.
"윽!"
끝이 뭉툭한 목검이지만 맞으면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가 상반신을 숙이며 피하자 이시므는 찔러가던 검의 방
향을 바꿔 그대로 내리그었다. 보를레스의 옆구리에 커다란 자상을 남겼던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빨랐다.
하지만 검이 어깨를 내려칠 찰나 보를레스의 몸이 흔들렸다.
'빗나갔다!'
이시므는 재빠르게 상대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방금 전 그 움직임이 상대가 의도한 것이라면 간격을 제압하기
가 상당히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고속이동술인가?"
"비슷하지만 틀립니다. 고속이동술은 한 방향인데다 방향을 도중에 바꾸기 힘듭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방금 전 정
면으로 움직이다가 뒤로 이동했어요."
"간격이 자유자재라는 뜻인가? 상대가 골치 아프겠군."
이시므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며 보를레스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사실 숲에서 당한 상처 때문에 어떻게든 골려주
고 싶었던 것이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쏘냐. 이제는 두들겨주는 것만 남았다.
보를레스는 아래에서 위로 검을 쓸어 올렸다. 상대가 피했지만 그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달려가며 연속으로 검을
내리쳤다.
탁! 딱! 딱!
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막고 있는 이시므를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숲에서 싸울 당시에 그는 상
대의 불규칙한 리듬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급소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도둑발' 때문이었다. 사실 멜첼의 힌트는
검의 속도와 리듬이었다. 자신만의 리듬을 암호처럼 알아채기 힘들게 만들어낸다면 그의 빠른 검을 막을 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한 가지를 추가했다. 바로, 간격이었다. 그에게는 간격을 지배할 수 있는 도둑발이 있었던
것이다. 도둑발의 빠른 움직임은 한 순간의 찰나에도 몸 전체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발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서
몸을 이동시키는 거리는 고작 몇 cm에 불과했지만 종이 한 장의 두께로 승부를 겨루는 검사들에게 그 차이는 컸
다. 간격과 타이밍을 지배한다. 어찌 보면 단순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검 이론.
파앗!
"크윽!"
"보를레스 승!"
젠티아 드로안과 더불어 '세일피어론아드의 양대 검사'로 일컬어지는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의 독자적인 검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후일, 젠티아 드로안은 보를레스의 무식할 듯한 돌진검술을 보고 '담력 검술'이라고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