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11화
그로부터 6일이 지나도록 글로디프리아군은 카로안군을 14 번이나 공격했다가 뒤로 물러서는 행동을 반복했다. 카
로안군의 용병들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글로디프리아의 괴롭힘으로 피로도 쌓여갔지만 또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밤에는 작은 소리에도 잠을 설쳤다. 그리고 하나 둘씩 병사들과, 용병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재상, 지휘관들이 적극적인 진격을 주장하고 있어. 나 역시 그렇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용병왕 자크가 '값싼 남작'
을 두려워하여 진격을 미룬다는 말까지 있네."
"폐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벌써 전투가 개시된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실
베니아는 내란(內亂)에 휘말려 있습니다. 헌데 이틀 전 저녁, 공작 파이얼 로바메트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정
보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내게는 왜 알려주지 않았나?"
"일을 함에는 조이고 푸는 조절이 잘 되야 합니다. 지금처럼 조급할 때 푸는 게 냉철한 판단을 하게 합니다. 어제
아침에 수도의 정찰병에게서 보고를 받았습니다."
자크는 쫙 편 손바닥을 다른 손의 주먹으로 탁하고 내리쳤다. 바르스젠의 행사는 왕의 권력을 침해하는 수준이었지
만 이제껏 틀린 바가 없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자크의 감탄을 자아냈다. 슬쩍 미소를 띄우며 바르스
젠이 말을 이었다.
"실베니아의 독수리를 견제할 수 있는 중앙의 전략가는 로바메트 뿐입니다. 앞으로 십 여일, 빠르면 삼 사일만에 펴
온은 함락될 겁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젠티아 드로안이 이 곳에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글로디프리아를
내어주더라도 수도로 갈 수 밖에요. 그렇게 생각할 때 만약 저들의 전법은 우리 군대를 상대로는 효과가 있지만 실
베니아 전체를 놓고 생각할 때는 악수(惡手)입니다. '값싼 남작'이 그럴 리가 없지요."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드로안 남작은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앞으로 3일 내로 카로안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으로 군사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다면?"
바르스젠은 심호흡을 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한 마디가 나왔다.
"드로안 남작의 부재가 확실합니다. 그는 이미 중앙으로 떠났을 겁니다. 그리고 중앙의 기사단으로 킬유시 공작을
상대하겠죠. 그 남자라면 할 수 있겠죠. 그 동안에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여유있게 카로안군을 격파하고 합류,
또는 뒤에서 반군을 협공한다라는 계획일 겁니다."
고이신 바르스젠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만약 젠티아가 글로디프리아에 있었다면 오히려 그를 감당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모르는 게 있었다. 바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 젠티아가 중앙으로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바르스젠은 실베니아의 이번 내란(內亂)을 명전략가의 야심에서 나온 단순한 반란으로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후일, 평생동안 이 날의 패인을 바르스젠은 풀지 못한다.
다음 날 해가 올라왔다가 산등성이로 사라지고 다시 떠올랐을 때 용병왕 자크는 시미터를 번쩍 들고 명령을 내린
다.
"진격한다. 지휘관들은 먼저 앞장을 서고 뒤로 물러날 생각은 버려라. 오늘 승부를 결정짓겠다."
카로안의 진영에서 시작된 말발굽소리와 함성이 땅을 뒤덮으며 검은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마주나온 글로디프리아
의 병사들이 방패를 내밀었다. 군대가 처음 부딪힐 때 검을 휘두르는 건 바보짓이다. 어지간한 거검이 아니면 수십
명의 몰려든 방패의 무게를 막아낼 수도 없다.
"갑자기 거세졌어."
보를레스는 요번 전투보다 카로안군의 공격이 강해졌다고 느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백 장의 꽃잎들도
난색을 지으며 상대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뒤로 밀리지 마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끼어든 마크렌서 자작이 고함을 쳤다. 상대는 총공격을 하고 있었다. 매복과 함정도 접전일
때 효과적인 것이다.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매복도 함정도 소용없다.
"오늘이야말로 네 녀석의 정체를 밝혀주마."
이번에도 어김없이 보를레스에게 자크왕의 시미터는 날아들었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그 동안 몇 번의 격돌로 익숙
해진 보를레스는 가볍게 쳐냈다. 하지만 속임수였는지 뒤를 이은 공격이 더욱 빠르게 짓겨 들었다.
창! 파악! 창! 창! 창!
한 호흡만에 그들은 벌써 수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내가 더 빨라!'
보를레스는 자신만의 검술로 자크왕을 뒤로 몰아붙였다. 자크 왕은 상대 기사의 몸에서 아홉 줄기의 빛줄기가 한꺼
번에 쏟아져 내리는 착각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기세였다. 보를레스는 아직 일격을 가하는 중이었지만 다져진 그
의 검기가 앞으로의 검격을 미리 준비하여 일어난 것이다. 보통 검사라면 보지 못했겠지만 자크왕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로 꼽히는 이였다. 때문에 눈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착각의 현상에 당황했다.
"질 수 없지!"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용병왕 자크. 용병국에서 당할 자가 없으며 1:1의 전투에서는 패배가 없다는 용병들의 우상
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검을 뿌렸다.
"크윽!"
신음을 터뜨린 사람은 자크였지만 뒤로 물러난 쪽은 보를레스였다. 왼팔의 완갑 바깥에 날카로운 검의 흔적이 나있
었다. 자크는 공격할 때 어쩔 수 없이 겹쳐지는 손목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상반신은 어
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다리는 아니라서 허벅지 부근에 커다란 자상을 입고 말았지만. 어쨌든 자크는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데 만족했다.
"워낙 빨라서 모두 막는 것은 무리겠지만 동시 공격조차 무리인 것은 아니군. 그렇다면 해볼만 하지."
만약 다른 국가의 왕이었다면 허벅지의 부상에 호들갑을 떨고 뒤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크는 용맹한 용
병들의 왕, 기본적으로 승부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와 보라고!"
'이번에는 더 빠르게!'
마음을 굳게 잡은 보를레스가 호랑이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가 검을 들고 내려칠 간격을 좁힐 때 자크가 미소
를 지으며 시미터로 허공을 십자로 베고는 뒤로 물러섰다.
'멈출 수가 없어!'
보를레스는 용병왕이 방금 전과 같이 동시 공격을 해오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더 빠른 일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돌진하던 중이었다. 뒤늦게 자크왕이 남긴 허공의 십자가 이상한 기운을 품었다고 느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부딪힐 수밖에!'
"크아아아아!"
괴수와 같은 기합을 내며 보를레스는 일검을 내리쳤다.
콰아아! 그극! 그극!
팔이 찌릿찌릿하며, 찢어진 검의 기세가 갑옷을 할퀴고 가는 게 느껴졌다. 보를레스는 눈살을 찡그리며 자크왕의 다
음 일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자크 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네‥. 정말로 드로안 남작이 아니군. 남작이라면 자신의 기술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어쨌든 재밌었네. 하
지만 이제 끝낼 시간이야."
자크는 귀고리를 빼어 공중으로 휙 던졌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펼쳐졌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르스젠이 병사에게 신호를 하여 깃발을
흔들었고 카로안군의 지위관들은 검을 높이 들어 인정사정없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물러서지 않는다. 카로안군! 돌격하라! 흑색거성에 닿을 때까지 돌격하라!"
슈우‥ 콰앙!
마법사들도 나섰다. 카로안군이 전력을 다한다는 증거였다. 마크렌서 자작은 이미 전세가 굳어졌음을 알고 입을 악
물었다. 글로디프리아군에 후퇴의 고동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