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악장 12화
"너무 빠릅니다. 이러다가는 후퇴한다고 해도 뒤에서부터 먹혀 들어갈 거에요!"
"할 수 없어. 우선은 포시킨의 평원까지 후퇴하는 수밖에. 멜첼, 좌군으로. 말리온, 우군으로. 계획대로 후퇴한다."
글로디프리아군은 2 시간 정도의 공방전 끝에 뿔뿔이 흩어지며 후퇴했다. 포시킨 평원에서 흩어진 병사가 합류하고
다시 부대를 제정비했지만 돌아온 자들은 원래 있던 수의 삼분(三分)의 일도 안 됐다. 백 장의 꽃잎 중에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카로안군의 피해도 많았지만 어차피 4배의 차이가 있는 군사력이었다.
"피해가 너무 막대하군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용병왕을 잘 막아냈더라면‥."
죄책감에 맥없이 앉아있는 보를레스의 어깨를 마크렌서 자작이 강하게 두들겼다.
"자네는 기대 이상으로 잘했어. 모두 예견되었던 일이네.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
"예견되었다고요?"
보를레스의 놀란 반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브드닌, 정말 대단한 자야. 나도 설마 카로안군이 이토록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할 줄은 미처 몰랐네."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군의 후방이 시끄러워졌다. 한 기사가 달려와 말했다.
"카마의 마나이츠 페르베이안님께서 일 만 명의 군사와 200여명의 마법사를 이끌고 오셨습니다."
"하핫‥! 내가 조금 늦었나?"
"아닙니다, 백작님. 때맞춰 오셨습니다. 이렇게 카마영지의 도움까지 청해서 죄송합니다."
가뭄의 비처럼 달려온 카마군의 지휘관들과 마나이츠에게 마크렌서 자작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특히 마
나이츠는 대마법사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그의 요청으로 불려온 마법사들의 지원은 엄청난 도움일 될 게 분명했
다. 그러나 마나이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젖었다.
"에이‥. 됐어. 카로안군의 규모는 대국가전과도 비교할만해. 그걸 글로디프리아 혼자서만 막아낸다는 것은 다른 영
지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나이츠의 주름살진 얼굴이 술에 취한 듯 붉어서 보를레스는 그가 토클레우스의 감사에 쑥스
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멀뚱히 보고 있던 보를레스에게 어느 새 다가왔는지 토루반이 물었다.
"보를레스."
"아! 토루반, 덕분에 용병왕 자크에게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밀리지 않았는데 갑옷 꼴이 그게 뭔가?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손을 봐눠야겠네."
갑옷을 벗은 보를레스는 심하게 놀랐다. 그는 조금 상처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옷은 찢어지다시피 했던 것이
다. 건틀릿마저 내려놓자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거 왜 이러죠? 갑자기 온몸이‥."
"마나이츠가 신경 써서 '마나의 길'을 그린 덕에 근육의 한계를 넘지는 않았겠지만 혹사당한 것은 마찬가지야. 지금
잠시라도 쉬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미스릴이 들어간 갑옷이라고 해도 생물이 품고 있는 가장 창조적이고 가
장 파괴적인 기운을 당해낼 수는 없어. 검기는 왠만하면 피하도록 하게. 이번에는 갑옷에서 끝났지만 다음에는 치명
상을 입을 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보를레스를 막사로 들여보낸 토루반은 갑옷을 들고 사라졌고, 마나이츠는 마크렌서에게 물었다.
"피브드닌의 말처럼 정말로 카로안군의 진군이 조급해졌나?"
"조급하다기보다는 승리를 확신한 듯한 모습입니다. 앞으로 30분이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허허‥ 용케도 이런 작전을 생각해냈군. 좁은 골짜기에서 일만오천의 군사로 육만의 카로안군을 막아 주변 영지의
군사들이 도착할 시간을 번다. 그런 후 불리하면 후퇴하되 뒤로 후퇴하면 카로안군의 돌격에 휘말려 전멸할 가능성
이 있기 때문에 골짜기에서 평원으로 나오는 즉시 양옆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골짜기에서 돌격했던 카로안군은 벌
어진 군사들의 진형을 재정비해야 하지. 그 사이에 양옆의 군사들도 정비를 하고 중앙에서는 타영지의 원군과 합류
하여 협공한다라‥. 그런데 과연 카로안군이 양옆으로 갈라진 패잔병들을 쫓지 않을까?"
"아마도 그들의 진군 속도를 줄이지는 않을 겁니다. 거대한 글로디프리아의 성도 그들에게 보일 겁니다. 흥분하겠
죠. 조금만 더 오면 성을 공략할 수 있는데 시간을 들여 패잔병을 쫓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죠."
마크렌서 자작, 아니 피브드닌의 생각대로 카로안군은 패잔병을 감지했지만 그 수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무시하고 진군을 계속했다. 그 소식을 들은 마크렌서 자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나이츠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계속 퇴각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승리의 깃발을 올릴 때가 왔습니다."
"너무 좋아하는 군.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지?"
농담같은 마나이츠의 질문에 토클레우스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 군사들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맡기지. 난 후방에서 마법사들을 이끌고 지원에만 신경쓰도록 하겠어. 전방에서 날
뛰다가 일찍 죽고 싶지 않네."
육십 세가 넘었는데도 얼마나 더 살고 싶어서 저러는지‥. 토클레우스는 카마군 지휘관들의 자존심이 상할까하여
물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글로디프리아의 '값싼 남작'의 심복으로 알려진 마크렌서 자작은 뛰어난 지휘관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매일 같이 그
들의 용맹을 들었던 주변 영지의 기사들은 우상으로 여길 지경이었다. 수염 털털하게 난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망울
에 토클레우스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2막을 시작해보죠."
카로안군의 모습이 초원의 지평선 부근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 때, 글로디프리아에서 달려온 전령이 어찌나 급한지
넘어지듯 엎드려 부복을 하고 말했다. 그의 음성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자작 각하, 드로안 남작께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