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00)

                                           41악장 13화

"정말인가? 지금 어디에 계시지?" 

"막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아이킨이 마중을 나갔습니다. 이 곳으로 곧 오실 겁니다." 

"하하‥. 알았다. 군사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마라. 귀관들도 마찬가지요." 

기사들은 마크렌서의 당부에 의문이 깊었지만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으면  카로안과 다시 한 번 격돌

해야 하는데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할 위험이 있었다. 전투 전에 군기(軍紀)가 흐트러지는 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한

다. 

"각하, 카로안군이 전방 700m까지‥." 

"알았다. 자아‥. 마지막 정비와 함께 우리도 돌격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밀리지 마라!" 

"옛!"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부대마다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이 오가고  군사들은 무기를 나르고 착용하느라 난리다. 빠른 

퇴각을 위해서 무기를 내던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봐야겠군. 마사지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토플레." 

"흠‥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를레스가 손을 뒤로 흔들어대며 막사를 나가자 토플레는 얼른 짐을 꾸렸다. 당장 글로디프리아로 갈  생각이었다. 

전장에 있다가 운이 좋지 않으면 목이 떨어지게 될 게 두려웠다. 

"암암! 걱정 안 해. 내 목숨 건질 생각만 해도 바쁜데 남의 걱정할 시간이 어디있겠나." 

토루반이 준 갑옷을 입자 보를레스는 다시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껄껄 웃으며 그는 검을 휘둘러보았다. 

"힘이 솟는 이 기분! 정말 중독되겠는데요?" 

"이번에는 조심하라고. 갑옷의 안까지 상처가 나서 '마나의 길'이 손상을 받으면 네 근육이 받는 부담이  더욱 커질 

거야." 

"괜찮아요. 맨몸으로 싸워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말은 잘 하는 군. 죽지 말게." 

"돌아와서 술이나 한 잔 하도록 하죠. 토클레우스가 뜯기로 한 거 나도 줘야 되요." 

힘차게 말을 달려나가는 보를레스를 바라보며 토루반은 고개를 저었다. 

"미리 토클레우스한테 받아내서 숨겨둬야 겠어." 

한 편, 군을 정비하자마자 저돌적으로 달려온 카로안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글로디프리아군을 격파했는

데 조금 전보다 더욱 수가 불어난 게 눈으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양군의 전방은 격돌하고 있었다. 용병왕은 머리로 고민하기보다 힘줄이 돋은 팔로 시미

터를 꺼내어 달려드는 병사를 양분해버리고 외쳤다. 

"싸워라! 조금 수가 늘었다지만 '값싼 남작'이 없는 글로디프리아의 군대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허수아비의 검을 받아봐라!"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젖을 겨냥하는 검을 시미터가 댓 번이나 막아냈다. 묵직하면서도 섬광처럼 빠른 연속 검격. 용

병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있었지. 이번에는 그 투구를 벗겨주마!" 

"쉽게는 당하지 않는다." 

말은 그리 했지만 보를레스는 금새 힘겨워지는 걸 느꼈다. 

'피로가 누적된 건가?' 

숨을 깊이 들어 마시며 그는 피로를 날리기 위해 기합을 터뜨렸다. 

"하압!" 

"좋아! 투지가 대단하군." 

그러나 이내 문제가 자신이 아니라 상대한테 있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세일피어론아드의 3대 검사로 꼽히는 용병왕

이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막고 공격하는 단순한 검로(劍路)의 시미터가 허공을 춤추는  나비처럼 

요란스럽게 날아왔다. '제뷔키어'가 번개처럼 막아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시미터에 번번히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했

다. 

'말을 타고 있으니 도둑발을 쓸 수도 없고‥.' 

그극! 

왼쪽 어깨부근에 시미터가 스쳤다. 용병왕의 검술은 나비처럼 팔랑거렸지만 검에 실린 무게는 마치 멧돼지  같았다. 

그러니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로 몇 번을 내리쳐도 금새 방향을 바꾸며 베어오는 것이다. 

'여러 번 쳐서 안 된다면!' 

슈웅! 

보를레스는 고삐를 버리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우레같은 소리를 파공성으로 곁들이며 '제뷔키어'가 시미터에게 

부딪혔다. 

탕! 

"약하군." 

그러나 용병왕은 잠시 멈칫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격을 재개했다. 

'윽! 저 요란스러운 검술의 타이밍을 도저히 잡기가 힘들다. 어떻게든 리듬을 찾아야돼.' 

뒤로 물러서던 보를레스는 호흡을 서서히 시미터의 변화에 맞췄다. 검이 뒤집어질 때 숨을 내쉬고 허공에서 요동을 

칠 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변화에 용병왕은 흥미로워졌다. 

'이 녀석은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군. 위험한 녀석이야. 여기서  죽여야 한다. 적어도 팔  하나 정도는 잘라놔야 

해.' 

"후우‥." 

용병왕의 팔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어졌고 그 때에 맞춰  보를레스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나의 길'을 통해서 

손가락 끝으로 마력의 힘과 함께 또다른,  자신만의 기운도 느껴졌다. 그것을 응축시키고  응축시켜 터뜨렸다. 팔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콰앙! 

"크아아아아!" 

"이― 애송이이―!" 

쾅! 

두 번의 폭음이 이어졌다. 첫 번째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다음은 두  검사의 기운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마

법사들의 마법처럼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보를레스와 자크는 뒤로 튕겨 나갔다. 

털썩. 온몸이 쑤시듯이 아파왔다. 아무래도 '마나의 길'이 손상된 모양이었다. 

'이거 돌아가면 또 토루반의 잔소리를 듣겠는 걸.' 

그런데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통증이 문제가 아니라 팔, 다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움직여주는 게 없었다. 

철컹거리는 갑옷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용병왕인가? 제법 잘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보를레스, 괜찮나?" 

"메, 멜첼‥?" 

"하하, 정신이 없군." 

멜첼은 완전히 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보를레스가 용병왕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기사들도 몇 배나 많은 카로안

군을 상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했으니까. 그의 부축을 받아서 일어나면서 보를레스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

다. 

"왜지? 카로안군이 퇴각하는 것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눈까지는 다치지 않은 모양이군." 

"어떻게 된 겁니까?" 

"각하께서 돌아오셨다." 

카로안군은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후퇴하는 카로안 군사들 속에서  말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있는 

사내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당한 건가? 이봐, 돌아가기 전에 자네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사내는 바로 용병왕이었다. 글로디프리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퇴각하게 되자 아쉬운지 영 힘이 없어 보였다. 보

를레스는 힘겹게 투구를 벗었다. 방금 전의 격돌로 투구의 면갑도 괴물의 형상처럼 상처가 가득했다. 

"보를레스,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라고 합니다, 폐하." 

"잊지 않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폐하." 

                                              * * *

"그렇게 된 겁니다." 

"대단하군. 지금 몸은 좀 괜찮은 건가?" 

입을 동그랗게 만들며 놀라움을 표시하는 젠티아. 그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익살스러워서 보를레스는 웃음을 참

고 말했다. 

"지금 먹고 오늘 밤 푹 쉬면 괜찮겠죠." 

"그나저나 내 갑옷을 녹여서 마법의 갑옷을 만들다니‥ 토루반, 역시 드워프의 현자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마나이츠

님 역시 대마법사라는 말이 허명은 아니었군요. '마나의길'을 그려넣다니‥." 

"에헴‥." 

두 노인네가 헛기침을 해대며 킬킬거렸다. 은근히 성격이 맞는 두 사람이다. 

"피브드닌도 고마워요. 덕분에 글로디프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중앙으로 갈 준비를 합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젠티아는 건배하듯 스프를 후루룩 마셔버렸다. 

이틀 날, 해가 따사로이 비출 무렵‥ 

"꼭 이렇게 가셔야 합니까?" 

보를레스의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적어도 시즈의 얼굴 정도는 보고 가셔야‥." 

"괜찮아. 여유가 생기면 직접 찾아오겠지. 그럼‥ 남작, 끝까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중에 떠나는 우리는 용서해주

시게." 

젠티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토루반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갚지도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에 적(籍)을 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실베니아를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스틴 내부(內部)에서 

그리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젠티아로서는 그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갚지 못하다니 마크렌서 자작의 세인라커 한  병으로 빚 청산은 끝났네. 그래도 부족하다면  아스틴에 왔을 때 한 

병 더 가져오게나." 

"몇 병인들 못 가져가겠습니까?" 

토루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보를레스에게 다가갔다. 

"그 갑옷을 손질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얼마 없을 거야. 조심하기 바라네." 

"예." 

아침에 토루반은 보를레스의 갑옷에서 드로안의 문장을  없애고 대신 히데우그 가문의 문양을  넣었다. 보를레스는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내가 아스틴에 도착했을 때는 새로운 검사의 탄생을 대륙 사람들이 알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토루반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아직도 어기적거리며 인사를 끝맺지 못한 

피브드닌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타지 못하겠냐?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도 아니고, 토클레우스가 네 연인이라도 되는 거냐?" 

"하핫‥ 어서 가십시오. 많이 배웠습니다." 

"저야말로 할 말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 뒤로 글로디프리아의 거대한 성체가 보였다. 검은  거인에게도 인사를 하며 피브드닌은 마차의 

문을 닫았다. 

'난 지식으로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전쟁을 보며‥ 지식은 활용할 때 달라지며, 그 활용이 

성공하도록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 

"다음에 또 보자고, 친구!" 

마지막으로 먼 산길의 바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드는 토플레의 모습을 보고 우정의 소중함도 알았다. 

그를 먼 곳까지 데려다준 사람으로 예측되는 노마법사, 마나이츠가 옆에서 토루반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있

었다. 

그 길로 아스틴네글로드로 돌아간 피브드닌은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을 뿐 아니라 실용과의 연계에도 힘써 훗날  아

스틴네글로드 제일의 학자로 명실공히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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