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00)

                                            42악장 1화

환기(環期) 4672년 5월 24일 아침.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이 떠나고 3일 후, 시즈들이 도착했다.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은 그들의 귀환에 기뻐했지만 

금새 경악에 목젖을 떨어야했다. 잠옷을 입은 상태로 마중을 나왔던 젠티아는 다시 뛰어들어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나와서 시즈의 뒤에 잠자코 서있는 노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로바메트 공작 전하‥. 이렇게 오시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드로안 남작‥. 예의는 되었네. 잠옷이 잘 어울리던데 왜 갈아입고 온 건가? 하트 무늬 잠옷‥ 세간에서 값싼 남작

은 괴짜라더니 오늘 그 진가를 보게 되었군." 

"우하하하핫!" 

공작 앞에서 낄낄대고 웃을 수 있는 배짱을 가진 것은 오직 마나이츠 뿐이었다. 그의 작위는 고작(?) 백작이었지만 

대마법사라는 또다른 지위를 염두에 둘 때 그의 권위는 공작 이상인 것이다.  그것을 말리지도 못하고 젠티아는 한

숨을 내쉬었고 마나이츠는 복수는 이 때다 하여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추태입니다." 

"네, 넬피엘?" 

"다녀왔습니다." 

음성의 주인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공손히 인사를 하자 마나이츠의 입이 함박만해졌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넬피엘이

었다. 비록 넬피엘 자신은 집사로서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귀엽게 보이는 마나이츠, 눈에 뭔가 

씌어도 단단히 씌워진 것이다. 하지만 가득히 벌어진 사람은 그 뿐이 아니었다. 토클레우스를 비롯한  글로디프리아

의 기사들은 음성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버렸다. 

"저렇게 생길 수도 있단 말인가?" 

데린, 아리에, 레스난 등의 미인들로 상당히 눈이 높아졌다고 자부하던 기사들 중 누군가 누군가의 중얼거림. 그 때 

아리에를 힐끔거리던 로바메트의 아들, 파세닌이 손가락을 꼽으며 강의하는 교수처럼 말했다. 

"주의하세요. 넬피엘은‥ 남자입니다." 

"으악!" 

"세, 세상에‥." 

마크렌서 자작, 카로안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놀라서 혀를 찼다. 어떤 사람은 비명을 지

르기도 했다. 그런 반응을 뒤로하고 넬피엘이 젠티아에게 말했다. 

"성으로 들어가는 게 예의가 아닌가?" 

"그렇군. 공작 전하, 들어가시죠." 

"흠흠‥ 그러지." 

로바메트는 돌이 되어버린 마크렌서 자작의 어깨를 툭툭치고  어서 극복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젠티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파세닌도 아리에에게 바짝 붙어서 시즈를 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군요. 역사의 고리가‥." 

"자네도 그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어쩔 수 없는 앙숙이죠. 저와 시즈는 동료라서‥. 자주 부딪히게 됩니다." 

로바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전에 시즈들에게 들은 바가 있는 이야기였다. 

"하면‥ 킬유시 공작께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현재 중앙을 장악한 게 '역사의 고리'라면 장인어른의  반란은 허무한 

결과를 낳을 뿐이죠." 

"음‥. 어쨌든 시즈님과 넬피엘님 덕분에 우리 로바메트 부자가 목숨을 건졌네. 어떻게 해서든 은혜를  갚도록 하겠

네. 그런데 아들 녀석은 험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철이 없군." 

"하하‥. 토클레우스, 공작 공자께서는 뭘 하고 계시지?" 

"그, 그게‥." 

마크렌서 자작이 말끝을 흐리는 걸 듣고 로바메트 공작은 벌써부터 미리 머리를 감싸쥐며 골치를 앑을 준비를 했고 

젠티아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귀를 기울였다. 

"좀 전에 보니‥ 시즈님께 결투신청을 하신 모양입니다." 

"하아‥." 

"힘드시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로바메트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 시각, 연병장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내가 무서운 거냐?" 

마을에 내려가서 그새 갑옷을 사 입었는지 파세닌이 금속성을 요란스럽게 내며 소리쳤다. 한 편, 나무그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시즈는 자못 곤란한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책을 읽던 도중 따귀를  맞고 결투를 신청 

받은 것이다. 처음부터 씩씩대며 파세닌이 다가왔지만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붉게 부푼 볼을 문지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사건의 발단은 파세닌이 아리에에게 멋지게 보일  양으로 글로디프리아의 시장에서 갑옷을 사오던  중에 발생했다. 

글로디프리아는 전시(戰時)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상품(上品)을 구한 파세닌은 자신의 모습에 감탄할 

아리에를 상상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흠흠‥ 혹시 아리에 양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나?" 

"지금 연병장에 계실 거에요. 아마 시즈님과 같이 계시지 않을까요?" 

파세닌이 지나가는 시녀들을 잡고 말을 묻자 그녀들은 궁전의 인기가수를 만난 귀족여인들처럼 얼굴을 붉히고 대답

했다. 

"뭐라고!? 그 이상한 녀석과?" 

희어멀건한 머리카락에 잘 언 동태의 눈을 하고 있는 청년. 파세닌은 왜  아리에가 시즈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뛰어가려고 코너를 돌았을 때 연병장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각했다. 다시 물어보려고 걸음을 멈췄

을 때 방금 전 시녀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다. 

"흥! 시즈님같이 상냥한 분이 이상하다니. 저 남자가 바로 이번에 아리에님의 뒤를 졸졸 따라서 왔다는 로바메트 공

작의 아들이라면서? 시즈님께 팔을 잘리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더니 정말이잖아." 

"얘, 누가 들을라." 

"흥! 누가 들으면 어때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시녀는 걸음을 빨리하여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벽에 등을  붙인 채 듣고 있던 파세닌

은 잠시 시녀의 말을 되새김질해보았다. 

'팔이 잘리다니? 그러고 보니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목격했을 때 팔목이 붕대에 감겨있었다. 블리세미

트라는 꼬마 사제는 내가 어쩌다가 다친 거냐는 말에 웃기만 할 뿐 말해주지 않았지.' 

"설마 그 녀석이 내 팔을 잘랐던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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