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00)

                                            41악장 2화

"그 녀석이 감히 내 팔을 잘랐던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그리고 파세닌은 당장 달려갔다. 하지만 금새 지나가던 또다른 시종에게 연병장의 위치를 물어야 했다. 

시즈는 시녀의 말대로 연병장에 있었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여름이나 다름없는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그는 

책장을 넘겼다. 바람이 불어오자 반짝이며 흩날리는 청년의 은발에 옆에 앉아 과일을 깍고 있던 아리에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치 시즈의 주위에만 눈발이 날리는 듯 했기 했다. 약간 쓸쓸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편

안한 모습에 다른 이들마저 평화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얏!" 

"베었군요? 피가 나잖아‥." 

역시 과일의 껍질을 벗기던 데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에의 손을 잡았다. 레스난이 얼른 피나는 부위를 핥고 

주문을 외우자 흘러나오던 피가 멈췄다. 놀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정시키며 데린이 약하게 꾸짖었다. 

"그러길래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어요?" 

"괜찮아요." 

"무슨 소리에요!?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아리에는 용병 생활로 상처에 익숙했지만 데린은 아니었다.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무시하고 아리에는 과일을 깍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즈를 힐끗 훔쳐보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파마리나는 과일을 깍는데는 정말 소질이 없나봐." 

데린은 파마리나가 껍질을 알맹이보다 더 두툼하게 깍는 것을 꼬집어 말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파마

리나 또한 고심하고 있었다. 얌전히 과일 씻기로 업종을 바꾸는 파마리나를 보고 레스난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인어의 마력으로 차가운 물을 생성하여 컵에 채우고 있었다. 

"내가 만든 특제보존제를 넣어주겠어. 이 더운 여름이 10번은 다시 찾아와도 썩지 않도록! 꺄하하하하하!" 

파마리나는 어쩔 수 없이 마녀인 모양이다. 그녀가 과일에 이상한 가루를 뿌리려는 것을 아리에와 데린이 가까스로 

막았을 때 청명한 음성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시끄럽군. 거기 마녀 좀 조용히 못하겠어?" 

시즈 뒤에서 나무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넬피엘이 여자들이 꺅꺅대는 소리에 일어난  것이다. 그가 신경질을 

내자 꿈틀대는 거대한 마력에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 때 시즈가 깨어난 넬피

엘이 반가운 듯 말했다. 

"넬피엘, 일어났군요? 이 마법원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서 묻고 싶었는데‥." 

밝게 웃으며 시즈가 머리가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넬피엘은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데

린은 그걸 보고 불꽃이 바람에게 약하다는 젠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머리를 맞댄  두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스

난이 중얼거렸다. 

"그림 된다‥." 

성안을 해매다가 연병장에 막 도착한 파세닌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에게 있어 웬수 같은 두 남자. 괴상하게만 

보이는 그들을 보며 여자들인 얼굴에 붉은 홍조를 살풋이 띄우고 넋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세닌은 번뜩하고 시장의 무기점에서 산 장검을 빼내며 외쳤다. 

"나, 파세닌 로바메트. 로바메트 공작가의 명예를 담아 시즈 세이서스에게 결투를 청한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겹다는 얼굴로 넬피엘이 중얼거렸다. 파세닌도 소녀보다도  더욱 소녀같은 이 소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글로디프리아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확인했기 때문에 자존심에 흠집은 났지만 오직 시즈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즈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음으로 담담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파세닌은 시녀에게 들었던 내용을 생각할수록 분한

지 씩씩대며 말했다. 

"잘렸던 내 팔의 원수를 갚겠다." 

"당신의 팔은‥ 읍!" 

사정을 말해주려고 한 아리에의 입은 파마리나의 손에 의해 방해를 받고 말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항의하려는 아리

에의 귀에 파마리나가 속삭였다. 

"시즈는 자극이 좀 필요해. 경쟁자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걸음일 걸." 

"그래도 이건‥." 

파마리나의 눈에는 살기등등하게 검을 빼든 파세닌이 자극(?)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즈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는 달려와서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파세닌, 뭐 하는 거 에요?" 

아리에가 벌떡 일어나서 따지자 질투에 눈먼 남자는 더욱 성이 나서 크게 말했다. 

"여자의 뒤에 숨어있을 건가?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시즈는 멍하니 있었다. 따귀를 때릴 정도로 완고한 결투  신청을 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천천히 투명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그는 일어섰다. 

"결투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빨리 검이나 뽑아라." 

시즈는 훈련을 하고 있던 한 기사의 검을 빌리고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영광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연습

시에 쓰는 검으로 아직 날을 갈지 않은 가검이었지만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시즈의 배려도 파세닌의 눈에는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네 녀석의 희여멀건한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해주마." 

"후우‥ 시작하십시오." 

파세닌이 자세를 잡자 멜첼은 휘파람을 냈다. 

'호오‥ 기본은 되어 있는 걸!? 적어도 호랑이의 자식이라는 건가?' 

갑옷을 입고서도 동작이 가벼웠다. 파세닌이 장검을 휘두르자 시즈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피했다. 멈추지 않고 다

가가서 검을 세 번 더 휘두르는 파세닌. 그렇지만 수많은 강적을 상대했던 시즈는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그리고 몸

을 튕겨 파세닌을 스치며 몸을 돌려 검을 내리쳤다. 

따악! 

"크윽!" 

피하지 못했다. 파세닌은 아버지가 공작인 덕에 뛰어난 기사들로부터 교육을  받기는 해지만 시즈는 기사들도 놀라

는 뛰어난 체술의 소유자. 걷는 듯 하면서도 뛰고 있고 뛰는 듯 하면서도 걷는  듯한 동작의 묘는 한 번 봐서는 쉽

게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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