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00)

                                            42악장 3화

따악! 

"크윽!" 

피하지 못했다. 파세닌은 아버지가 공작인 덕에 뛰어난 기사들로부터 교육을  받기는 해지만 시즈는 기사들도 놀라

는 뛰어난 체술의 소유자. 걷는 듯 하면서도 뛰고 있고 뛰는 듯 하면서도 걷는  듯한 동작의 묘는 한 번 봐서는 쉽

게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즈의 오묘한 움직임에도 파세닌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패배를 인정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흠모하는 아리에양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걸로 그만입니까?" 

시즈는 그답지 않게 비꼬는 말투로 파세닌을 조롱했다. 귀신처럼 뒤로 돌아가 상대의  어깨를 짚기도 했고 턱을 툭

툭 치기도 했다. 오랜만의 독서를 방해받아서 잔뜩 화가 난 것이다.  게다가 뺨까지 얻어맞았으니. 파세닌이 자신을 

얕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헉, 헉, 헉!" 

어느 새 날이 저물 때까지 몇 시간이 흘렀지만 파세닌은 시즈의 옷깃도 건들이지 못했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안쓰러

울 정도로 숨을 헐떡이던 그는 결국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파세닌의 몸을 툭툭 걷어찬 시즈는 그가 기절했음을 알자 

시녀들에게 데려가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너무 심하지 않았어? 그래도 공작의 아들이야." 

"그래서요? 가서 고개라도 땅에 박고 빌고 올까요?" 

아리에의 말에 시즈는 차갑게 반문하고는 책을 잡았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아리에가  눈을 크게 떴고 황급히 데린

이 말했다. 

"너무 하잖아, 시즈. 아리에는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파세닌님이 제게 시비를 자꾸 거는 이유는 아리에가 확실히 않아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말한 시즈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책에 열중했다. 

"아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시즈가 더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서 아, 아마도‥ 그럴거야." 

레스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과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시즈를 떠올리고  말을 더듬었다. 그들은 현재 파세닌의 

방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즈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리에로서는 그가 심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파마리나가 고개

를 저었다. 

"하지만 시즈의 말도 배제할 수는 없어. 레스난은 그동안 함께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할 때

까지 시즈가 연인임을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한 아리에에게도 잘못은 있어. 파세닌이  얼마나 달라붙었니? 그 때 확

실하게 말해줬으면 그도 추근거리지 않았을 거야." 

그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냉기가 푸르던 시즈의 눈동자가 떠

돌고 있었다. 

"시즈, 질투하는 건가?" 

여자들이 떠나고 넬피엘이 묻자 시즈는 책에 머리를 파묻듯이  들이댔다. 그러나 넬피엘은 이미 보았다. 흰 피부가 

붉게 물든 것을‥. 시즈는 표정이나, 안색의 변화가 드물었지만 피부가 희여 변화가 일어났을 때 쉽게 알아챌 수 있

었다. 키득거리며 넬피엘은 뒤로 고개를 젖혔다. 

"질투를 하기보다는 확실하게 말하는 게 어때? 여자를 상처 입히는 질투보다는 진실하게 질투를 표현하는 게 더 좋

을지도 몰라. 화풀이를 하려다가 화풀이 상대가 되어버리다니‥. 불쌍한‥." 

위 넬피엘의 수식어에 이어질 대상은 현재 감격한 상태였다. 시즈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아리에

가 문병 온 것이다. 

"으윽!" 

불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비트는 걸 보며 아리에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할  때 토플레가 코웃음을 쳤다. 파

세닌은 단순한 탈진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오‥ 아리에 양. 이렇게 와주시다니‥." 

"팔은 이제 괜찮나요?" 

"팔이요? 아‥ 그것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이 파세닌 로바메트! 감격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저한테 아무 

것도 아니죠." 

파세닌이 아리에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흐느끼는 모습에 레스난은 다리에 비늘이 마구 일어서는 걸 느꼈다. 어떻게 

그걸 견디는지 의아스럽게도 직격으로 보고 있는 아리에의 입가에는 미소마저 떠올라있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사실 파세닌의 팔에 대해서 저도 책임이 있거든요." 

"에?" 

갑자기 파세닌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금새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요. 이해합니다. 앞으로 함께 할 반려자의 상처에 책임감을 갖다니!  오오! 그대는 제게 있어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천생연분(天生緣分)입니다." 

"그, 그게‥." 

제 무덤을 파고만 아리에. 그녀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 파세닌이 자신에게 가진 연모의 정을 이용해서 시

즈가 그의 팔을 자른 것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했었는데‥. 당황하는 그녀를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모른 척 외면했다. 

파세닌은 그게 여자들이 눈치있게 시선을 피해 자리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아리에를 와락하고 안았다. 

"악! 무슨 짓이에요?" 

아리에는 기겁을 하여 그를 밀쳤다. 파세닌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요. 다들 알아서 자리를 피해줄 겁니다." 

뒤에 서있는 소녀와 여인은 기가 막혔다. 오죽하면 레스난이 그토록 싫어하는 마녀의 귀에 소근될 지경이었다. 

"어머‥. 인간은 눈치가 빠른 걸로 유명한 종족인데‥ 가끔 돌연변이가 있다더니 정말이로군요?" 

"저건 돌연변이가 아니라 환자야. 토플레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토플레의 입은 약간 삐뚤어져 크게 벌어져 있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이정도 였으리라고

는 생각하지 못하여 충격이 큰 듯 싶었다. 

다시 끌어안으려고 하는 파세닌을 밀치고 아리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파마리나의 말대로 확실히 하는 게 좋

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게 아니에요. 난 이미 시즈에게‥." 

아리에는 본인 앞에서 하기 힘들었던 고백을 다른 사람 앞에서 털어놓게 되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결국 '마

음을 허락했어요.'라고는 도저히 하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아리에의 절대적인 실수였다. 파

세닌은 특기처럼 빠르게 오해의 늪에 빠져들었고,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는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갑옷

을 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그럴까?'하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아리에 등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 네 이놈! 감히 아리에 양의 순결한 몸을 덥치다니!! 용서 못한다아아!" 

"휴우‥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 미리 시즈에게 소식을 알려서 쓸데없는 소란을 피하도록 해야겠어." 

아리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난기로 빛나는 파마리나의 눈동자를 보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는 종이에 몇 자를 적어서 잘 날도록 종이새를 접어서 날렸다. 

한 편, 넬피엘에게 질투보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라는 넬피엘의 충고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에 여념이 없

었다. 그 때 날아온 종이새가 그의 이마를 쪼았다. 

"윽! 뭐지?" 

성을 보니 파마리나가 손짓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리에가-쓸데없는 말로 불화를 좌초했다는 자책감으로-눈물

을 글썽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종이새를 펴본  시즈는 움찔했고 주위에 차가운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넬피엘은 뭐 때문에 시즈가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힐끔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파세

닌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왔을 때 시즈는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손짓을 하자 방에 놓아두었던 시즈의 예도

가 마력에 이끌려서 날아와 잡혔다. 태양보다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망설임없이 진검을 빼드는 시즈를  보고 

아리에는 파마리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물었다. 

"도대체 파마리나, 뭐라고 적은 거야?" 

"말했잖아. 시즈는 약간의 자극이 필요하다니까." 

"그래도 이런 건 필요없어어어!" 

넬피엘은 팔랑팔랑하고 떨어지는 종이를 잡았다. 호기심 어린 소년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적힌 내용을 읽은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도로 누웠다. 휙 하고 던져버리는 종이새는 이와같은 글씨를 품고 있었다. 

'시즈. 파세닌이 강.제.로. 아리에를 끌.어.안.았.어!'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아리에가 있는 방의 건너편 창문에서 젠티아가 낄낄대고 웃었다. 로바메트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정상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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