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4화
글로디프리아의 활기도 얼마가지 못했다. 곧 있어 들려온 '반란군의 수도 점령'이라는 소식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
으로 그들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드로안 남작, 아직도 반군에서는 연락은 없는가?"
"죄송합니다."
젠티아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로바메트 공작이 말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엇인가."
글로디프리아의 회의장은 온통 침통한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분위기 파악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파세닌도 아리
에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조용히 있을 정도였다. 그의 몸은 여기저기가 붕대로 둘둘 감겨있었다.
"변심한 거야."
넬피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젠티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닥쳐라, 넬피엘. 그럴 분이 아니야. 함부로 혓바닥을 놀렸다가는 너라고 해도 가만 놔두지 않겠어."
기운이 담긴 목소리에 촛불이 꺼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넬피엘은 코웃음 쳤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젠티
아가 가장 고심하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군요."
시즈가 결론을 짓자 모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젠티아의 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가 집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힘들게 의지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
렸다.
"들어와요."
"젠티아‥."
그녀는
"데린‥."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걸까요?"
데린은 젠티아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녀의 몸이 떨려오는 것에서 울음을 참고 있음을 안 젠티아는 꼭 끌
어안으며 달랬다.
"괜찮을 거야. 암‥. 실베니아의 푸른 독수리를 누가 어떻게 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젠티아 또한 깊은 탄식을 참고 있었다.
"미안해요. 당신도 힘드실 텐데‥."
"무슨 소리야. 언제든지 말해요. 데린에게 빌려줄 가슴은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 때, 그의 귀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들렸다. 수련을 통해서 발달한 오감은 엘프를 뛰어넘을 정도였기 때문에
성의 뒷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란도 놓치지 않았다.
"데린, 잠시 나갔다가 올게. 뒷문을 경비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
"다녀오세요."
데린은 눈물이 동글동글 맺혀서도 밝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춘 젠티아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겨진 데린의 턱을 따라서 또르르 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글쎄! 안 된다니까! 지금은 전시(戰時)라서 신분을 확인할 수 없으면 무슨 소리를 해도 안돼!"
"이보게. 제발 부탁이네. 드로안 남작의 얼굴을 한 번만 보게 해주게. 아니면 드로안 부인의 얼굴이라도 된다네."
경기병에 매달려 애원을 하는 사람은 4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사내였다. 어디서 신나게 굴렀는지 오물까지도 붙어
있는 검은 로브 위에는 군데군데 핏자국마저 보이고 있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심상치 않은 자인 것만큼은 틀림없
었다. 병사의 표정이 완고해지자 사내의 애원도 처절해졌다.
"제발 부탁하네. 내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지. 내 나이가 자네의 아버지 정도는 될 거야. 그래도 이렇게 고개를 숙이
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경비병은 동료에게 임무를 잠시 맡기고 젠티아를 기사들을 부르러 갈려고 했다.
"거기 무슨 일이지?"
"각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갑자기 젠티아가 늦은 시간에 나오자 경비병은 경례를 하고 말했다.
"이 남자가 영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여‥."
"그래?"
반문하며 젠티아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악취마저 나는 사내에게서 어쩐지 불길한 냄새도 함께 풍겼다. 얼굴이 보일
만큼 다가섰을 때 중년 사내의 눈이 독수리처럼 빛났다.
"네 이노오오옴! 젠티아 드로안!"
젠티아는 사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무술이나 검술을 오래 수련한 달인은
상대의 기운만 가지고도 그가 악인인지, 선인인지를 알기도 했고 심지어는 몸의 상태까지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의 기운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폭발할 시점을 기다리는 듯 했던 것이다.
"죽어라!"
겉모습에 쓰러질 듯한 사내로 보기에는 눈부신 빠르기였다. 그러나 괜히 젠티아가 대륙 삼대 검사겠는가? 가볍게
피한 그는 사내의 팔을 잡아서 팔목을 꺽었다. 그러자 들고 있던 단검이 툭 떨어졌고 젠티아가 다시 한 번 메쳐버
리자 바닥에 낙법도 못하고 부딪혀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영주님, 저, 전 이 남자가 하도 애원을 해서‥."
경비병이 변명을 했지만 젠티아는 듣고 있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벗기자 그의 얼굴은 놀람
으로 마구 색칠됐다. 아직까지도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사내에게 젠티아는 큰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가서 의사들을 오라고 해! 기사들도 부르고!"
"예? 예!"
두 경비병이 부리나케 달려가고 젠티아는 중년의 사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사내를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장인어른‥ 무슨 일을 당하신 겁니까?"
그렇다. 중년의 사내는 바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었다. 처참한 몰골이 되어 글로디프리아를 찾아온 킬유시 공작.
그는 왜 젠티아를 죽이려고 했을까.
젠티아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성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데린과 아리에, 그리고 시즈가 동시에 달려왔다. 데린
은 젠티아의 팔에 안겨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비틀거렸다.
"아, 아버지‥. 아버지!"
"진정해요, 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