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5화
‥‥ 잠시 후,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데린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서 물었다.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막 치료를 끝낸 토플레는 준비되어 있던 대아의 물에 손을 닦았다. 시커먼 피가 투명한 물을 변색시켰다. 옆에 놓여
있는 쟁반에는 화살의 촉을 비롯하여 썩기 시작한 살점과 치료도구가 놓여있었다. 시녀에게 부탁하여 그것들을 치
우게 한 토플레는 꽤 시간이 걸린 시술로 몸이 쑤시는지 몸을 뒤틀며 자리에 앉았다.
"화살촉이 깊이 박혀있어서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할 뻔했습니다. 동작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화살대를 잘라내셨던
듯 합니다. 그걸 제외하면 큰 부상은 없습니다. 다만 자잘한 상처들이 더러운 무언가로 오염되어서 썩기 시작했더군
요. 그래서 썩은 살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과다하게 움직여서 탈진상태입니다. 참고로 전의 파세닌
님의 탈진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블리세미트의 강한 신성력으로 생명의 술을 받는다 해도 꼬박 하루는 움직이지 못
할 겁니다."
"고마워요, 토플레."
"뭘요, 부인. 저도 기쁩니다."
눈을 찡긋하고 토플레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데린은 침대에 푹 잠겨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 킬유시 공작의 손을 꼭
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너무나 잠잠했기 때문이다. 막 토플레에게 소식을 듣고
밖에서 들어온 파마리나는 갑자기 경직했다.
"파마리나?"
아리에가 의아함이 담긴 어조로 그녀를 불렀지만 이미 데린에게 다가서 있었다. 파마리나는 데린을 거칠게 잡아당
겼다.
"떨어져."
"왜 이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마법에 걸려있어. 아리에, 당장 가서 마법사들을 불러와."
시즈는 이미 문 밖에 있었다. 넬피엘은 아직도 마나이츠의 옆방에서 골아 떨어져 있었지만‥. 마나이츠가 잠옷에 가
벼운 웃옷을 입고 넬피엘과 함께 달려왔을 때, 먼저 들어온 시즈는 눈을 감고 킬유시 공작의 마나를 감지하는 중이
었다. 그에게서 퍼져나간 바람이 킬유시 공작을 휘감았고 공작의 몸이 공중으로 조금씩 떠올랐다.
"대단하군. 순수한 마나만으로 사람을 띄우다니‥."
젊은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양에 마나이츠는 감탄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젠티아에게 그의 수준에 대해
서 들은 바가 있는데다가 넬피엘도 청년 이상의 수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지가 끝나자 킬유시 공작의 몸
은 침대에 다시 내려앉았고 데린은 흐트러진 하도너의 머리와 이불을 잘 정리해주었다.
"파마리나가 말한 대로 최면 마법이나, 암시에 빠져있습니다."
시즈의 말에 따라서 파마리나의 콧대가 위로 촥 올라갔다. 그러나 피식 웃은 시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불완전한 암시입니다. 술사가 시전을 중단했거나 도중에 어떤 방해를 받았거나 피시전자가 거부를 했거
나‥."
그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시즈 좀 도와다오. 하암 ."
넬피엘은 로바메트 때처럼 마력으로 암시를 깨뜨리려고 했다. 불완전한데다가 본인이 거부하는 암시라면 억지로 깬
다고 해서 별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설명했다.
"간단해. 비정상적인 마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 마나의 흐름을 깨는 거지. 마나의 흔적이 남으면 부작용이 생기니
까.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의 강한 마력으로 없애버려야 해."
그렇게 말하고 넬피엘은 멀뚱히 시즈를 바라만 보았다. 시즈도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투명한 목소리로 난폭하게
소리쳤다.
"빨리 하라고!"
즉 도와달라는 것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시즈는 넬피엘의 말대로 하기 위해 마나를 일으
켰다. 휘잉하고 방의 창문들이 모두 열리며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마치 만나서 반갑다는 듯 시즈의 주위를 빙글
빙글 돌았다. 회색빛의 잠옷 때문일까? 날리는 은발에 눈을 살짝 감은 그의 모습은 바람의 정령을 마주한 듯 했다.
이윽고 충분한 바람의 마나가 모이자 바람의 신은 명령을 내렸다. 바람의 마나가 하도너의 신체를 감쌌다.
"으윽!"
하도너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리자 데린은 불안했지만 젠티아가 어깨를 꼭 잡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이내 바람의 마나는 하도너의 몸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마나를 쓸고 나왔다. 넬피엘의 파괴적인 마력은 다른 마나를
아예 소멸시켜 버리지만 시즈의 것은 아니었다. 힘을 나눠주거나 힘을 덜어가서 균형을 맞춰주고 불필요한 것은 쓸
고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바람은 맞으면 맞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환자인 하도너 킬유시 또한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는 좀 전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시즈."
데린의 감사에 시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또한 부름에 기꺼이 와준 바람에게 감
사를 내심 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바람을 쐬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을 맞고
나면 그는 딴 사람처럼 변했다. 은발이 흘날려서인지 모르지만 지금도 좀전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우리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시즈와 아리에를 비롯하여 글로디프리아의 기사와, 손님들은 드로안 부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돌아갔다. 단, 참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만 빼고.
젠티아가 마크렌서를 잡고 말했던 것이다.
"자네도 킬유시 공작께서 이곳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반군의 실태에 대해서 예측이 있을 거야. 참모부들을 불러. 당
장 회의를 해줘. 나도 잠시 후에 가겠어. 장인어른이 일어나셨을 때 우리는 모든 경우에 대한 준비를 끝내놓아야
해."
젠티아의 눈은 방금전까지 데린을 달래던 자상한 눈이 아니었다. 기사로서, 그리고 전장에서 이름높은 '값싼 남작'
으로서 유성과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크렌서 자작은 그의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카로안군의 침략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비하면 해일 전의 파도였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토클레
우스 마크렌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