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6화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아. 나는 오히려 자네들의 모습에 안심했어. 아직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킬유시 공작은 회의장에 앉아서 고민으로 죽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글로디프리아의 기사와 참모들을 보면서 뭐
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뜨자마자 힘든 몸을 부축하여 데려온 곳이 회의장이라는 사실에 처음
에는 놀랐지만 기사들이 논의하고 있는 내용에는 더욱 놀랐다. 자신이 반란군을 떠난 이유와, 그 파장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될 듯 싶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시즈는 고개를 간단히 숙였다. 그리고 로바메트 공작도 보였다.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시즈, 떠나지 않았군. 로바메트 공작, 그대가 납치되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있었군요. 이거 희망이 점점 늘어나는
걸."
"아버지, 이제 말해주세요. 반란군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휠체어 뒤에 서있던 데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킬유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무 재촉하지 말려무나. 솔직히 말해서 회상하기 싫거든."
회의장의 모두가 침묵 속에 빠져서 그의 이야기가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예전부터 실베니아의 국정에 개입하는 단체가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베니아가 위태로워지는 게
그 단체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이 나라의 귀족들이 잘못되었던 거지. 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릇된 선택이었던 거야. 나는 이제껏 많은 전쟁외교와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니었지. 로바메트 공작은 믿을 수 없게도 국력소모를 마다하면서 반군에 대항했
어. 젠티아 자네도 부르지 않고‥. 나는 당황했지. 그래도 시작한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란(內亂)의 장기화를 걱
정하고 있을 때, 로바메트 공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네. 안도하고 기다렸지. '궁에서 젠티아를 부를 것이다.'
하고. 이틀쯤 지났을 거야, 그 날 밤, 펠리언과 페이튼이 왜 펴온을 점령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지. 나는 이유를 설명
했고, 둘은 납득하지 못했네. '전하께서 애초에 세우셨던 계획은 모두 어긋났습니다. 이제는 직접 나라를 바꿔야 합
니다.'하고 소리치더군. 그 때, 녀석들이 들이닥쳤어."
"역사의 고리입니까?"
"그래. 자네도 알고 있군. 처음부터 국정에 은근히 개입하던 바로 그 단체였지. 어떤 어쌔신도 그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거야. 소리없이 잠입하여 보초병들을 바닥에 눕혀버렸지. 공포스러웠지. 어둠을 바른 듯한 갑옷의 기사는 펠리
언과 페이튼이 함께 덤벼도 당해낼 수 없었다면 믿겠나?"
"충분히 믿습니다. 바스티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바스티너? 바스티너라고? 어둠의 감옥이라고 불리는 미크릴의 갑옷을 말하는 건가?"
킬유시 공작이 되묻자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킬유시 공작은 놀라워하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파멸의 열쇠 중에 하나였군. 어쨌든 바스티너의 활약으로 난 저항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
어. 그리고 묶여서 그들의 비밀 막사에 있는데 작은 소녀가 들어오더군.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을 천진난만한 얼굴의
귀여운 용모를 지닌 소녀였지."
"호, 혹시 암시를 걸지 않았나?"
로바메트 공작이 다급히 묻자 킬유시 공작은 오히려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어떻게 알았지? 자네 말대로 소녀는 나에게 최면 마법을 걸어서 암시를 주입시키려고 했네. 그런데 펠리언
이 밧줄에 묶인 채로 뛰어들어오며 소녀를 밀치고 날 도망치게 했어. 난 필사적으로 달리고 숨었네. 화살이 박혔는
지도 몰랐어. 나무에 줄을 매고 늪으로 뛰어들었네. 아! 봄이라 농부들이 쌓아둔 거름더미는 녀석들의 눈을 피하기
좋더군."
젠티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킬유시 공작이 경비병이랑 실랑이를 할 때 불쾌하게 풍겼던 악취는
바로 동물의 분뇨(糞尿)였다. 데린은 아버지의 고생에 눈을 훔쳤다. 그러나 젠티아는 웃으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고맙네. 하지만 내 계획은 실패했어. 실베니아를 더욱 어지럽히고 말았네."
"그것은 공작 전하의 실수가 아닙니다. 로바메트 공작께서는 암시에 걸려 계셨습니다. 전하께 암시를 걸었던 그 소
녀가 바로 술사였지요."
"그게 사실인가?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은 멋쩍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자네는 대단한 거야, 하도너. 암시에 걸렸으면서도 도망을 치다니‥."
"완벽하게 걸리지는 않았으니까."
"후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쯤 반군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아! 자네는 모
르겠지!? 반군이 수도를 점령했네."
킬유시 공작은 휠체어의 팔걸이가 부서질 정도로 꽉 잡았다. 빠득하고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로바메트는 그
의 힘줄 돋은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말했다.
"자책하지 말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야."
"맞습니다, 전하. 저희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킬유시 공작은 회의장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좋은 눈빛이군.'
다들 투지에 불타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미래라도 이들이라면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킬유시 공작은 믿
었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들을 믿고 최악의 가상을 해보지."
"감사합니다."
"역사의 고리는 아무래도 개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 즉 실베니아의 변화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실
베니아를 새롭게 만들려는 사람들이지. 역사의 고리는 자네들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어. 내가 '역사의 고리'라고 치
고 자네들을 제거하고 싶다고 친다면‥. 반군으로 수도를 점령한 후에 항복하겠지."
"예? 항복한다고요?"
"명목상의 항복이지. 그들은 정권을 잡을 거야. 뒤에서 국왕을 조종해서 귀찮은 방해물을 없앤다. 수도로 부르는 거
야. 군사들은 제외하고 자네들만‥. 죄를 물어서 부르면 군사를 일으킬지 모르니까 중대한 회의나, 연회를 열지도
몰라. 귀족들은 국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혹시 또 모르죠. 우리 망나니 남작님이라면‥."
어느 기사의 한 마디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확실히 '값싼 남작'이라면 국왕의 연회나 부름도 무시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국왕의 허락 하에 불참의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오라는 어명이라면 거역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정말로 반란군이 그런 행동을 할까요? 너무 비관적인 예측이 아닙니까?"
"마크렌서 자작, 나는 자네가 뛰어난 전략가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 킬유시 공작의 뒤를 이을 전략가라면서 사람
들의 칭찬이 대단하더군. 하지만 '적'이라는 것은 말일세‥. '나'에게 비관적으로 움직인다네."
킬유시 공작이 막 말을 맺었을 때였다. 회의장의 문을 병사가 노크하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영주님, 수도 펴온에서 국왕 폐하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
모두가 경악하여 토끼눈을 뜨고 킬유시 공작을 주목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킬유시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전장의 푸른 독수리'는 허명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