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7화
…중략
반란군의 봉기(蜂起)와 카로안군의 침략이라는 안팎의 위기으로 인해 본국은 존망(存亡)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단결과 지혜로 실베니아는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그 중에서도
반란군의 괴수, 파이얼 로바메트의 꾀임에 빠졌던 반란군을 실베니아의 충성스런 군대로 되찾은 펠리언 라카스와,
카로안 육만군을 격퇴해낸 글로디프리아의 젠티아 드로안 남작을 특히 치하하는 바이다. 그리고 자국(自國)의 위기
를 극복하기 위해 힘써준 모든 신민(臣民)에게 감사한다.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실베니아의 되찾은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고자하니 이 글을
읽는 경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주기 바란다.
끝에 찍혀있는 국왕의 인장처럼 젠티아의 가슴에도 선명하게 걱정이 찍혔다.
"펠리언이 다음 꼭두각시로 점찍혔군요."
"그게 문제입니까?"
"그럼?"
마크렌서 자작의 물음에 젠티아는 징그럽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대체가 이 사람은‥.'
젠티아는 문제의 파악이 끝나고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논의(論議)
중심을 옮기려고 하기 일쑤였다. 마크렌서 자작은 혹시나 하여 물어보았다.
"설마 혼자서 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당연히 안 가지, 하하핫. 내 귀여운 시즈를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어?"
고아한 인상의 시즈가 떫은 감 씹은 듯한 표정을 변했다. 파마리나는 옆에 있는 아리에의 옆구리를 툭치며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저 사람은 위험해."
아리에는 말없이 데린을 째려봤고 데린은 섬뜩하여 젠티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윽! 이런! 임자가 있었군. 그렇다면‥."
살살 돌아가는 젠티아의 눈동자. 광채가 돌아나며 비춰질 때마다 사람들은 몸서러질치며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그
의 시선이 멈춘 곳에 있던 사람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난 너 싫다."
"나도 너 싫어. 그냥 한 번 쳐다본 거야. 생긴 건 귀여운 주제에 말투는 왜 그 지경인 거야."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적인 충격을 먹었던 모양인지 젠티아는 구석에 쪼그리고 박혀버렸다. 데린이 어깨를 안으며
달랬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마크렌서 자작은 아니었다. 그는 웃음이 나오는 분위기를 깨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결국 시즈님 일행과 넬피엘님만 동반하고 수도로 가시겠다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궁전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작 각하뿐이지 않습니까?"
"시즈도 있어."
"그렇다고는 하나‥."
"그만 하게, 마크렌서 자작."
마크렌서 자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킬유시 공작이 제동(制動)을 걸었다.
"자네는 지금 글로디프리아의 군대로 수도로 가고 싶겠지. 그러나 옳은 방법이 아니야. 내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
는 거지. 게다가 그들은 반란군이야. 반란군이 중앙에 항복한다는 의미가 뭔지 아나? 사람들은 민심이 왕실로 돌아
섰다고 생각할 거야. 지금 군사를 일으킨다면 '값싼 남작'의 명성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네.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지금까지 드로안 남작이 쌓았던 명성은 물거품이 되어버려."
"이상한 소문?"
"뭐‥ 예를 들면 불안한 시국을 타고 '값싼 남작'이 정국(政局)을 잡으려고 한다거나, 왕이 되려고 한다거나‥."
"그게 말이 됩니까?"
"진정해, 토클레우스."
냉정한 마크렌서 자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분노한 그를 젠티아는 진정시켰다. 킬유시 공작은 냉철하기로 유명한
마크렌서 자작이 흥분하는 이유가 주군에 대한 신뢰와 충성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부러운 심정이었다.
'나도 그대 같은 가신(家臣)이 있었다면‥.'
마크렌서 자작은 역시 뛰어난 자였다. 그는 금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 킬유시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
고 용서를 빌었다. 킬유시 공작은 손을 저으며 사과를 받지 않았다.
"괜찮아. 사과할 것 없네. 자네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기쁘기만 하군. 하지만 그렇게 남작을 마음으로는 믿으면서
실제로는 왜 믿질 못하나?"
"그, 그건‥."
"걱정 말게. '값싼 남작'은 뛰어난 사람이야. 게다가 대륙의 현자로 손을 꼽던 '마땅찮은 시즈'가 그의 옆에 있네.
뭐가 걱정인가?"
그의 칭찬에 시즈의 얼굴은 붉으스레 달아올랐다. 그에 비해 젠티아는 점점 콧대를 올리다가 데린에게 발을 밟혔지
만.
결국 마크렌서 자작은 승복했다. 그리고 왕궁으로 떠나는 일행은 다음과 같았다.
젠티아, 시즈, 넬피엘, 아리에, 파마리나, 레스난, 보를레스.
'사막의 사제' 블리세미트는 젠티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서 토플레님과 부상자들을 좀더 돌보고 가겠습니다."
어린 마음과 사제로서의 자애로움이 상처 입은 자들을 떠나지 못하게 잡는 모양이었다. 토플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사의 자애로움이라기보다는 위험한 곳에는 가기 싫은 듯 했다. 마크렌서 자작이 먼저 떠나는 이들에게 말했
다.
"블리세미트님도 저희와 함께 갈 것입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글로디프리아의 '백장의 꽃잎'과 킬유시 공작, 로바메트 공작과 그의 아들 파세닌 로바메트는 나중에 은밀히 움직이
기로 했다. 그런데 파세닌은 극구 반대했다.
"나도 먼저 가겠습니다."
"너무 위험하다."라고 말리는 로바메트 공작을 뿌리치고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납치되셨으니 제가 가는 것만으로 드로안 남작께는 상당한 힘이 될 겁니다."
"그건 사실이군요. 확실히 로바메트 공작이 아니셨다면 예전에 킬유시 공작께서 수도를 점령했을 테니까요."
이리하여‥
젠티아 일행에는 파세닌이 추가되어 8인이 되었다. 떠나기 전에 블리세미트는 그에게 한 가지 충고를 했다.
"시즈님께 시비 걸지 마세요. 이제는 제가 치료를 해드릴 수 없으니까 잘못 맞으면 몇 달은 고생해야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