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8화
자상한 소년 사제의 당부도 파세닌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한 모양이다. 파세닌은 글로디프리아에서 벗어난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아리에에게 추근댔다.
"아리에 양‥ 저걸 보십시오. 파릇파릇 피어났던 새싹들이 서서히 이제는 새끼새가 날개를 펴듯이 자라는 계절이
왔습니다. 그대와 나의 사랑도 이제 싹을 틔우는 단계를 지나서 열매를 맺을 계절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스릉―
창 밖을 보고 있던 젠티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시즈, 마차 안에서 검을 뽑지 말아 줘."
그럼에도 마차는 한 두 번 기우뚱거리면서 수도를 향해 잘도 달렸다. 펴온과 글로디프리아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중간에 거대한 산맥, 롤크가 끼어있어 상당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즈 일행은 급할수
록 돌아가라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강행돌파를 시도했다.
"으아악!"
엄청난 진동에 파세닌의 엉덩이는 벌에게 쏘인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마차가 가끔 높이 튕길 때마다 신나게 괴성을 지르는 젠티아는 인간이 아니기에 제외
했지만 아리에를 비롯한 여자들까지 지나치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고 있었다.
'왜 나만 꼴사나운 비명을 질러야 하는 거지?'
그 배경에는 시즈가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시즈는 바람의 마나로 사람들에게 포근한 쿠션을 선사했던
것이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사정을 알고 있는 아리에는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노릇도
아닌지라 밖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마차가 멈춘 것은 해가 서산 뒤로 넘어간 후였다. 여름의 입구에 들어서서 겨울의 낮길이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파세닌의 엉덩이를 진물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마차에서 걸어나오는 파세닌에게 파마리나
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파세닌, 어디 아파요? 증상을 말해보세요. 약이라도 드릴 테니‥."
"아, 아닙니다."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모두들 혀를 찼지만 아무도 위로를 건네는 이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사람도 시즈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테니‥. 그래서 자고로 시비도 골라서 걸어야 하는 법이다.
"이거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
수프가 끓을 때를 기다리던 보를레스는 투덜거리면서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쥐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졸고 있던
넬피엘까지 하품을 하면서 일어섰고 레스난는 아리에의 뒤로 몸을 숨겼다.
"크르르륵‥."
"몬스터로군. 수도 주변에는 기사단들이 자주 치안을 유지해서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야. 롤크 산은 충분히 깊으니까. 어딘가에 숨어있었겠지. 한동안 기사단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서서히 모습을
들어낸 거고‥."
담배 연기를 풀풀 풍기며 젠티아가 말했고 파마리나가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흔들며 담배 연기를 피하며 엄포를 놓
았다.
"당장 담뱃불 꺼요. 안 그러면 데린에게 말해버리겠어."
"그 동안 못 피었다고‥. 좀 봐줄 수 없어? 파마리나."
"절대로 못 봐줘요."
"쳇! 이거 스트레스 쌓이는 걸."
나이에 안 맞게 입을 삐쭉거리며 젠티아는 담배를 뭉갰다. 거칠게 검을 뽑는 모습에서 그의 분노를 몬스터들이 처
절히 받게 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트롤‥."
젠티아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트롤이라니. 그것도 여덟 마리나 됐다. 난폭하기로 유명한데다가 숙련된 용병이
라도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두 세 마리만 되어도 롤크 산 주변의 사람들이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여덟 마리가
한꺼번에 출몰했다는 사실은 실제로 20 마리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소식이 펴온의 기사단에게 들어가지 않
았을 리가 없으니‥. 젠티아가 한탄할 수밖에.
'도대체 얼마나 썩어버린 건가?'
실망한 젠티아를 비웃듯이 트롤이 입을 벌리고 침을 좔좔 흘렸다. 이빨 사이에 피묻은 사람의 옷자락이 끼어있는
걸로 볼 때 가까운 때에 식인(食人)을 한 게 틀림없었다. 내란(內亂)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온 수도 주변의 주민들이
그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이거 어려운데!?"
"뭐가?"
잘려도 다시 재생되는 트롤의 능력에 보를레스가 나름대로 고전할 때 파마리나가 반문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보를레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트롤의 처리를 끝낸 상태였던 것이다. 넬피엘은 주위에 재를
날리며 다시 코를 골고 있었고 젠티아는 난도질한 트롤의 시체에서 체액을 짜내느라 바빴다. 파마리나는 아리에가
트롤에게 꽂은 단검에 번개를 떨어뜨려 트롤을 먹기 좋게 구워버리고 레스난과 함께 수프가 끓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예도에 혹시나 피가 묻었나하여 살펴보고 있던 시즈가 갑자기 소리쳤다.
"파세닌! 그는 어딜 갔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데‥."
말을 한 파마리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시즈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수풀을 뚫고 달렸다. 그가 죽는다면 자
신 때문이라고 시즈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의 쿠션을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다면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은백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려가는 시즈의 모습은 한줄기 바람을 연상시켰다. 지나가는 자리에는 뒤를 놓칠 세라
바람이 뒤따르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크륵! 크왁!"
보통 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 시즈는 놓치지 않고 방향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