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9화
"이 놈들! 저리 꺼지지 못해?"
트롤 두 마리는 파세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바로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치웠을 것이나 좀 전에도
폭식을 했기 때문에 이번 먹이는 운동을 하여 소화를 시킨 후에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파세닌은 그
의 검술이 위협적이라 트롤이 접근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퍼억!
"으아악!"
장난을 치고 있다고 해도 트롤은 무서웠다. 한 녀석의 장난 같은 손짓에 나무에는 거대한 손톱 자국이 남았고 땅은
깊게 파였다. 어떻게 보면 파세닌은 용하게도 트롤의 장난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이 멀쩡하기만 했더라면‥."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파세닌은 체면 차리는 소리를 해댔다. 엉덩이가 조금 욱씬거리는 게 그토록 전투에 불리
하단 말인가. 조금 불리할 지도 모르지만‥.
파세닌의 중얼거림을 막 도착한 시즈는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몸이 정상적이었을 때는 과연 어떤 핑계를
대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가 위급했음으로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마침 트롤들은 제법 파세닌이 장단을 맞춰주자 좀더 스릴있는 게임을 즐기려고 장난의 속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당
황한 파세닌이 앞으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가까스로 피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지팡이 역할을
하면서 트롤의 발을 쿡 찍어버리고 말았다.
"크르르르‥."
트롤은 지금까지의 즐거운 음성(?) 대신에 으르렁거렸다. 무릎까지 늘어난 팔 근육이 힘줄이 돋으며 파세닌의 몸통
만한 나무몽둥이가 위로 번쩍 들렸다. 3m 가까이에서 떨어져내리는 몽둥이를 맞으면 파세닌은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게 분명했다.
"으흐흐흐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파세닌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 때 천둥소리가 몸 전체를 때렸고 그는 눈을 꼭 감았
다.
콰르릉!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구나! 다른 사람들이랑 떨어져서 트롤에게 잡아먹히다니‥.'
뚝! 뚝! 뚝!
'뭐지? 이 액체는‥.'
뭔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파세닌은 용기를 가지고 눈을 부들거리며 떴다.
"쿠륵! 캬아아아악!"
그 순간, 파세닌의 눈동자에는 두 마리의 트롤이 종이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서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이 들어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중심에는 그가 극도로 싫어하던 한 인물이 고요히 서있었다. 파세닌의 얼굴에 떨어졌던 액체
는 트롤의 혈액이었다. 그래서인지 묻은 부위가 따끔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표정에서 시즈가 이유를 눈치채
고 품에서 손수건을 건넸다.
"고맙소."
파세닌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목숨을 구해주었으니까. 그의 감사에 시즈는 기쁜 듯 은은하게 미소
를 지었다. 아주 잠시였다. 파세닌이 시즈의 미소를 직면(直面)한 것은‥. 그러나 그는 자신이 꽤 오랜 시간 넋을 잃
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은발의 청년이 가진 미소는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파세닌은 뇌리에 파고든 미소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흠흠! 이제 막 본래 실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참이었지만."
끝까지 지지 않으려는 그의 외침에 시즈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돌아온 둘을 사람들은 반겼지만 음식은 반기지 않았다. 결국 시즈와 파세닌은 사이좋게 건포를 씹어야 했다.
"내일 점심이면 펴온에 도착할 텐데 뭔가 준비를 안 해도 될까요?"
"무슨 준비?"
보를레스의 말에 젠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보를레스가 다시 말했다.
"킬유시 공작께서 말씀하시길 매복을 하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준비할 수가 없지 않은가. 연회에 무기를 소장하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근위기사단 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면 돼. 시즈와, 나, 그리고 넬피엘의 마법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니까."
"마법이라고요? 남작님께서도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보를레스만 입을 쩍 벌린 게 아니었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아리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파마리나도 고개를
돌리고 의아해했다. 그럴 것이 그녀도 젠티아에게서 마력으로써의 마나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젠티아는 기분이 상했는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라고. 나도 전설의 음유술사 중 한 사람이야."
"무시해도 좋아."
뒤의 말은 넬피엘의 발언이었다. 젠티아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의 표정을 지었지만 넬피엘의 다음 말을 듣
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마법이라고 해봤자, 환영 마법 정도잖나. 물리력을 가진 마법은 대지의 마법이 고작이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보를레스는 풀이 죽은 젠티아를 한 번 보고 떨떠름한 어조로 넬피엘에게 물었다. 넬피엘은 레스난과 파마리나를 가
리켰다.
"젠티아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가 둘이나 있다. 인어와 마녀라면 충분하지. 게다가 젠티아라면 검이 아니라고 해도
위협적인 기사다."
"나는 어떻게 할까요?"
"보를레스라고 했나?"
장신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넬피엘은 그가 등에 지고 있는 갑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법이 걸려있군. 꽤 뛰어난 자가 만들었어. 자연스럽게 마나가 흐르다니‥."
넬피엘은 보를레스의 활약상이 화제였던 저녁 식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즉, 한 번 보고 그의 갑옷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과연 대마법사 마나이츠도 인정하는 마법사라고 보를레스가 생각할 때 넬피엘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갑옷을 입고 정문을 열어라."
"저는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물어본 사람은 파세닌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않던 넬피엘은 반짝거리며 재
촉하는 파세닌의 눈빛을 견디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
"죽지만 마라."
"에?"
사실 넬피엘에게 파세닌은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방금 전, 그가 흠모하
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열성적으로 목숨을 구했으니 쉽게 죽일 수는 없어서 그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아리에?"
"네?"
"그대는 파세닌을 보호해."
아리에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검의 날을 손질하는데 열중했다. 토루반이 있었다면 직접 해주었을 테지만
아스틴으로 떠나고 없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해야 했다.
다들 넬피엘의 결정에 만족할 때 불복하는 이가 있었으니 파세닌 한 사람이었다. 넬피엘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
한 파세닌은 이를 갈며 물었다.
"왜 저에게만 그런 지시를 내리는 겁니까?"
넬피엘은 달라붙어 따지는 그가 귀찮았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리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을래?"
"아뇨."
그 날밤, 파세닌은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