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00)

                                           42악장 10화

예정대로 다음날 도착한 펴온은 내란(內亂)이 끝난 뒤로 벌써 활기를 띄고 있었다. 상인들도 가게의 문을 열기 시작

했고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에서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복구하느라 분주했다. 

"우선 저희 저택으로 가시죠." 

펴온에 대해서 가장 익숙한 파세닌이 안내한 곳은 시즈에게는 낯익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그 때는 비밀통로로 몰래 

들어갔었는데 이번에는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도련니이임!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주인님께서, 주인님게서 실종 되셨습니다." 

"도첼 집사. 난 어제 아침까지 아버지와 지겹도록 얼굴을 보다 왔어. 그것보다 중요한 손님들이  오셨으니까 방으로 

안내를 해드리도록." 

하인들은, 특히 집사는 파세닌의 말에 갈피를 못 잡는 듯 했다. '네, 네?'하면서 되풀이 묻는 걸 보니까 역시 집사는 

젊고 냉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시즈의 머리 속을 감돌았다. 시선이 은근히 넬피엘에게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러고 보니 일행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 것 같았다. 

"이 분은 젠티아 드로안. 글로디프리아의 성주이시자 '값싼 남작'으로 유명한 기사시지. 그리고 저기 은발에 얼어죽

은 동태눈을 한 친구는 시즈 세이서스라고 예전에 '마땅찮은 시즈'라고 불렸던 사람이야." 

공작가의 집사라면 절대로 모자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왠만한 학자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했다. 그들의  머

리는 귀족들의 인명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첼 집사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재는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을만큼 당혹스러웠다. 공작은 실종되었고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공작의 아들이 데려온 사

람은 대륙 삼대 기사로 유명한 젠티아 드로안과 역시 그에 비견되는 젊은 학자 시즈 세이서스라니‥. '마땅찮은 시

즈'라면 엘시크에서 세이서스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들었지만  파세닌과 젠티아이라는 인물들

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외모로만 봐도  범상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파세닌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집사는 자신의 생각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련님은 뛰어난 분이셨어. 값싼  남작과 마땅찮은 시즈라니‥. 이래서 주인님께서도  내버려두셨던 거야. 다 

알고 계셨던 거야.' 

"어,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차는 어디에 두면 되겠습니까?" 

"그냥 거기에 두시면 시종들을 시켜 마굿간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도첼은 마부라고 생각했던 이조차 엄청난 거구이자 이제는 놀라기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로바메트 공작 저택의 사람들은 바빠졌다. 시장에서 저녁 식사에 쓸  고기와 야채를 사고 팔뚝을 걷어붙

이고 집안을 깨끗하게 광냈다. 

노력에 보답을 하듯 귀한 손님들은 저녁 식사 때 방에서 나와서 반짝이는 바닥. 몇 시간 전까지는 칙칙하게만 보이

던 샹들리에의 찬란한 반사광에 맛깔스런 빛깔의  거위구이. 배가 고팠던 던지 사람들은 비만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거위가 냄새를 풍긴지 5분도 못되어서 뼈만 남겨버렸다. 그와 같은 성과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젠티아가 쩝쩝대며 

입을 열었다. 

"연회는 적어도 내일 저녁이니까, 오늘과 내일은 가볍게 즐기자고." 

"아니, 젠티아. 내일이면 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텐데 가볍게 즐기자고요?" 

"그럼 다른 방법 있어?" 

보를레스는 으르렁대는 젠티아의 시선을 가볍게 받으며 헤죽 웃었다. 

"당연히‥ 찐하게 즐겨야죠." 

그들이 찐하게 논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아리에‥ 나갈래요?" 

시즈의 데이트 신청에 아리에보다도 열정적인 표정을 지은 사람은 파마리나와  파세닌이었다. 두 사람은 표정은 정

말이지 대조되었는데 파마리나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고 파세닌은 완전히 일그러져서 야수를 연상케 하는 얼

굴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쓸 새도 없이 얼굴이 붉어져버린 아리에는 고개를 가까스로 끄덕였다. 

"이런‥ 갑자기 데린이 보고 싶네‥." 

"남작님께서 먼저 즐기자고 하셨잖아요?"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이번에도 날아오는 대답은 같았고 보를레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포크를 젠티아에게 겨누고 말했

다. 

"상대나 해주시죠." 

"흐흐‥." 

젠티아는 나이프를 흔들며 답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여 일행은 크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밖으로 나가는 부류와 저택에 있는 부류. 시즈와 아리에는 즐거운 데

이트. 파마리나는 시즈들의 연애 진도(?)를 훔쳐보기  위해, 파세닌은 방해하기 위해 검은 로브를  둘러쓰고 그들의 

뒤를 잠행(潛行)하며 따랐다. 젠티아와 보를레스는 포크‥가 아니라 검을 들고 대련을 하기 위해 저택의 뒤뜰로  향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스난은 앵두 같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눈을 말똥거리고 '뭘 할까∼?'하고 생각에 잠겼

다. 

그리고 집사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커다란 욕조에 물 좀 받아주시겠어요?" 

"갑옷을 입는 게 어때?" 

"그럴려고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보를레스가 말끝을 흐리자 젠티아는 의문을 품은 표정을 지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보를레스는 갑옷을 가리켰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마 이들이 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다들 배꼽을 잡았을 것이다. 적의 갑옷을 정성스레 입혀주는 손길. 낑

낑대며 갑옷을 입은 보를레스의 머리통을 젠티아는 강하게 두들겼다. 

"보를레스, 기사의 검술을 익혔다는 사람이 이토록 가벼운 갑옷은 혼자서 입지도 못하다니‥." 

확실히 보를레스의 갑옷은 전신에 가까운 부위를 감싸지만  그럼에도 다른 전신갑옷에 비하여 입기가 편한 종류였

다. 미스릴도 무게를 덜어주었지만 두께도 얇았고 드워프들은 작은 부분에도  섬세해서 팔목이나 어깨 등의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보를레스는 꿀밤에도 엄살을 떨었다. 

"윽! 젠티아, 치사하게 시작도 안 했는데 공격입니까?" 

"시작을 했으면 막았다는 거야?" 

"물론이지요."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를 뽑는 것과 동시에 보를레스도 성음검(聲音劍)으로 자세를 잡았다. 

"갑니다!" 

"얼마든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성음검과 제뷔키어. 날카롭게 허공을 찢어발기는  검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왜 히죽히죽 웃어대는 거야? 보를레스, 방금 전의 꿀밤맞고 실성한 거냐?" 

"남작님의 표정은 뭐 다른 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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