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00)

                                            43악장 2화

"국왕 폐하께서 연회의 시작을 알리시겠습니다." 

"허허‥ 마음껏 즐기시오."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간단명료하게 연회를 시작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그는  뒤

에 시립하고 있는 한 기사를 연신 힐끔거렸다. 마치 기사의 눈치를 보듯이. 

"저 사람은‥." 

젠티아는 포도주의 첫잔을 비우다말고 예리하게 기사를 노려봤다. 근위병들이 들고  있는 것들보다도 훨씬 길어 사

람의 키를 훌쩍 넘겨버리는 거대한 창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기사. 그에 대해서는 젠티아 뿐이  아니라 시즈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흔들리며 좌중에 깔렸고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펠리언 라카스‥." 

그러나 시종장의 손뼉과 함께 시작된 음악소리는 좌중의 긴장을 금새  가려버렸다. 연회답게 시끌벅적해지는 홀 안

으로 사람들이 한 둘 씩 들어서고 남녀가 손을 잡은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즈, 아리에와 한 곡 추고 오지 그러나?" 

"그, 그러나?" 

"걱장 말아. 지금 공격한다면 왕실의 위엄은 이미 사라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마도 연회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에 

시작될 거야. 그러니까 즐겨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젠티아는 또 한 잔 걸쳤다. 넬피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키득거리며 변명했다. 

"오, 넬피엘‥. 그런 눈은 그만둬. 그렇게 귀여운 표정을 짓다니, 이 술은 포도주라고. 포도주 한 잔이면 체온  상승! 

두 잔이면 흥분도 상승, 감각도 좋아지고, 통증 완화되고 싸울 때 술은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자네도 동방에 여행

을 다녀왔으니 알고 있지 않나? 동방에는 술 마시고 싸운다는 투술, 취권(醉卷)도 있어. 그리고 말야‥" 

넬피엘은 분명히 젠티아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저렇게나 말이 많으니‥. 술 깨는 데는 안주가 필수라는 말을 마나이

츠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는 칠면조 다리를 쭉 찢어서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젠티아의 입에 쑤셔 넣었다. 

"시즈‥. 왜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는 거야?" 

"그, 그게‥." 

"바보같이‥ 말해봐." 

"저, 저기‥ 이번에 실베니아를 떠나게 되면 나와 함께 세이탄으로 가지 않겠어요?" 

"세이탄?" 

"나의 고향입니다. 아직도 저택이 남아있을 거 에요. 보, 보여줄게요.  아침이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와, 새가 지

저귀는 숲‥. 내가 노래를 부르던 바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건가?' 

의아했다. 그러나 지나치도록 붉은 청년의 얼굴. 시선을 피하면서도 대답을 은근히,  아니 엄청나게 바라고 있는 모

습에 아리에는 깨달았다. 청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동시에 그녀의 얼굴도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그 때 곡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가 경쾌했다면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리에는 시즈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으음‥. 나도 보고 싶어. 아름다운 저택의 창으로 보이는 너와,  아침이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가를 걷는 네 모

습, 그리고 바위 위에 앉아서 내게 노래를 불러줄 너가‥." 

시즈의 눈동자가 서서히 그녀의 것과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 아리에는 발끝을 들어 순식간에 시즈에

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인 후 자리로 걸어 들어왔다.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던 파마리나가 닭다리를 뜯다말고 말했다. 

"아리에, 그 이상 달아오르면 타버릴 것 같아. 가서 좀 씻고 오지 그래?" 

그녀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걸신들린 듯이 먹어대고 있는 파마리나의 뭐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걸

까? 한 남자가 펜과 종이를 내밀며 여걸신(女乞神)에게 말했다. 

"당신은 변장한 어릿광대로군요.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묘기에요. 여기에 싸인 한 장  부탁합니

다." 

시간이 흐르고 연회의 흥분이 조금씩 사그라들 때 시종장이 외쳤다. 

"이제‥ 국왕 폐하께서 표창을 하시겠습니다." 

"오늘은 참 예외적인 것 같소. 보통 때라면 표창이나  치하를 먼저 하고 연회를 시작했을 텐데‥. 이해해주길  바라

오. 그 어느 때보다 국가적 위기를 물리쳐준 영웅들에게 확실한 감사를 하기 위해서니까. 우선 펠리언 라카스, 앞으

로 나오게." 

"예! 폐하." 

"음‥ 창은 두고 오게나." 

국왕의 말에 홀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펠리언은 창을 들고 와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던 것이다. 파이론  3세

는 엄숙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펠리언이 다시 와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그는 무게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 펠리언 라카스. 반란으로부터 이 국가, 이 왕실을 구해준 점을 치하하여 백작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고 근위

기사단장에 임명하니 앞으로는 짐의 곁에서 나라를 지켜주도록." 

파격적인 작위 상승에 귀족들은 논란에 휩싸였지만  잠깐이었다. 충분히 펠리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들도 

판단한 것이다. 

이윽고 젠티아의 차례가 되었다. 파이론 3세는 젠티아를 부르려다가 말고 그의 옆에 있는 여러 명을 보고 궁금하여 

물었다. 

"아까부터 내가 눈 여겨 보았는데 드로안 남작, 그대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요? 아무래도  범상치가 않구료. 소

개를 해주겠소?" 

젠티아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과연 폐하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우선 이쪽의 붉은 머리는 넬피엘 세로스라고 합니다. 마법사 마나이츠 페르베이

안 백작의 마지막 제자이며 그의 스승 스스로 자신보다 낫다고 칭한 천재입니다." 

"호오‥. 정말인가?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데‥." 

"저래 보여도 28살입니다." 

조금이라도 마법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귀족들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들의 눈이 이채를 발하고 있는 이유는 

젠티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붉은 머리의 귀여운 청년이야말로 장차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앞

으로 잘 보여야 하는 상대가 아니겠는가. 파이론 3세는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은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크게 

웃고 말했다. 

"과연‥. 그대, 넬피엘 세로스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대마법사 페르베이안 백작의 제자답게 아주 총명해보이는 구나. 앞으로 정진하여 정말로 스승을  능가하길 바란다. 

하하하‥ 곧 실베니아에서 제 2의 페르미안 유스테리아가 탄생하겠구나." 

페르미안 유스테리아. 인류 마법 사상 최고의 마법사. 국왕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난 칭찬이었지만 넬피엘은 어

여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렸다. 그러자 펠리언이 고함을 쳤다. 

"감히! 폐하께서 칭찬을 하셨는데 감사를 안할 망정 기분이 나쁘단 말인가?" 

"하하하하하하!" 

더욱 무례하게도 옆의 젠티아는 크게 웃어댔다. 실성했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는  웃음을 멈추고 파이론 3세에게 말

했다. 

"하하‥ 폐하, 용서하십시오. 넬피엘은 남자입니다." 

"뭐라고!?" 

파이론 3세을 비롯한 사람들은 넬피엘이 마나이츠를 능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놀란 것 같았다. 심지어

는 호랑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펠리언조차 입을 쩍 벌릴 정도였으니까. 

"허허허‥ 저 얼굴이 남자라니‥." 

헛웃음을 지으며 파이론 3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그렇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군. 이해하네." 

펠리언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를 때까지도 귀족들은 웅성거렸다. 그와  더불어 넬피엘의 얼굴도 급속도로 무표

정해져 갔다. 

"조용히! 폐하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으셨다!" 

"아아‥ 괜찮아, 펠리언. 근위대장이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사람들을 압박할  필요는 없네. 그래, 젠티아. 그 옆

의 사람도 소개해주게. 그 청년도 보통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은발이라니 정말 특이하지 않은가." 

"잘 보셨습니다. 이 친구의 은발은 충격을 받아서 머리의 색깔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주 까맸습니다." 

누군가는 혀를 찼다. 그 귀족은 연금술사였는데 사람의 머리가 희어질려면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아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반짝거릴 정도로 백색으로 희어졌으니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로 시즈 세이서스, 엘시크 최고의, 아니 대륙 최고의 학자라고 일컬어졌던 '마땅찮은 시즈.'입니다." 

"‥‥." 

좌중은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중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파이론 3세가 눈을 껌뻑댔다. 

"정말인가?" 

그의 어조는 지금까지 어떤 때보다도 신중했다. 

"틀림없습니다. 시즈는 엘시크에서 유명했던 봄의 혈사가 일어나기 전에 글로디프리아를 찾은 일이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기사단장님도 안면이 있으실 겁니다." 

"사실입니다. 저도 안면이 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시즈님." 

묻기도 전에 펠리언은 미소를 지으며 시즈에게 인사 건넸다.  시즈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파이론 3세의 시선이 시즈와 넬피엘을 살펴보다가 파세닌에 이르러서 멈췄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자네는 파세닌이 아닌가!? 짐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로바메트 공작은 무슨 염치로 아들을  연회에 보냈단 말인

가?" 

"진정하십시오, 폐하. 로바메트 공작께서는 실종되신 것입니다. 만약 그  분께서 없으셨다면 킬유시 공작에 의해 수

도는 순식간에 점령되었을 겁니다." 

시즈 일행도 국왕이 갑자기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젠티아가 황급히 말했다. 그러자 파이론 3세는 눈을  가늘

게 뜨더니 냉소하며 젠티아를 가리켰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젠티아 드로안, 그대가  로바메트 공작과 킬유시 공작을 짜고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다는 것을! 여봐라! 저들을 잡아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병들이 창을 꼬나잡고 달려들었다. 젠티아는 그 중  한 명의 창을 빼앗아서 다

른 병사를 막으며 외쳤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근위병들은 모두 저들을 모두 잡지 않고 무엇하느냐!" 

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괜히 싸움에 휘말렸다가 목이 날아가는 것이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을 그들은 확실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문이라는 문은  근위병들이 막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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