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00)

                                            43악장 4화

몸을 움츠리고 헤라즈가 정신과 신체의 힘을 모두 끌어  모으자 잠깐이지만 홀 안의 공기 자체가 희미하게 흔들렸

다. 그리고 주체하지 못하는 신성력과 기(氣)가 동시에 터지듯이 뿜어졌다. 기운이라는 것은 일반인은 보기 어렵다. 

숙련된 무사들에게는 눈에 보이듯이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헤라즈에게서 불거져  나온 기운은 무술이나 검술에 대

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귀족의 여인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되어 있었다. 

"예전보다 몇 배나 강해졌어. 시즈, 조심해라!" 

"당신이나 걱정할 시간이야." 

젠티아가 한 눈을 판 사이 창 하나가 소용돌이치듯 회전을 하면서 옆구리를 찔렀다. 검면에 손바닥을 대고 창을 막

으며 우아하게 몸을 돌린 그는 번개같이 검을 뿌렸다. 

카앙! 

"펠리언‥." 

"예전부터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는 젠티아 드로안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아니야! 오늘 이후로는 내가 최강이다!" 

그렇게 말하고 펠리언은 창을 세차게 돌려 성음검을 튕겨 내고 회전력을 이용하여 젠티아의 몸을 쓸어 갔다. 

홀 안은 이제 무도회장은 이미 난장판으로 전투장이 되어  버렸다. 시즈들을 공격한 공격에 맞고 죽어가는 귀족들. 

그들을 보며 페스튼은 히죽거렸다. 

"멍청한 놈들‥. 난 당신이 저들과 같지 않다고 믿고 있지." 

"나도 똑같아." 

"뭐라고!?" 

"나도 똑같다고!" 

아리에는 말이 끝나자마자 테이블을 밟고 펄쩍  뛰어 올랐다. 드레스 치마가 활짝 펴지며  그녀의 백옥같은 다리가 

들어나자 페스튼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과연‥ 아름답군. 잠깐 가지고 놀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페스튼의 눈동자는 광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리에는 발 차기를  할 것 같은 모션을 취하

면서 허리 뒤로 감추고 있던 단검 2개를 던졌다. 

쒜액!하고 파공성이 일었지만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페스튼이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스튼이 중앙군

의 기사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갑옷을 녹여서 새로 만든 두꺼운 강철 글러브에 부딪힌 단검들이 바닥에  나뒹굴렀

다. 

몸을 한 차례 훑어보며 페스튼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아리에의 온몸에는 

소름들이 빠득빠득 솟아올랐다. 마치 벌레들이 단체로 몸위를 기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만은 꼭! 죽여버리겠어." 

"후후후‥ 당신만은 꼭! 더럽혀주지." 

파세닌은 설마하니 이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누구하나 강해 보이고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었

다. 아리에마저도 위험한 상황. 그는 싸울 것을 결심했다. 

"내 상대는 누구냐? 어서 나와라!" 

"아하하핫! 주위에 많잖아요!" 

투지에 불타는 사내의 귓가에 들려온 음성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천진난만했다.  그러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터

에 어린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는 테이블 밑에서 혀를 내밀고 키득키득 웃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피가 튀고 비명이 산적한 연회장에서 웃고 있다니 파세닌은 여기에서 우선은 의심을 해보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소

녀의 당장에라도 안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미색 때문에 그는 홀린 듯이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었다. 식탁보로 

가려진 테이블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사물을 관철할 수 없지는 않았다. 파세닌은 꿈에  나올 것 같이 귀여운 소녀에

게 다짜고짜 안았다. 

"넌, 시녀로구나!" 

"예에‥." 

소녀는 파세닌이 갑작스럽게 안아버리자 당황했는지 부끄러운 듯 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

스러운지 파세닌은 몸을 비비꼬며 물었다. 

"후후‥ 귀여운 아이로구나. 이름이 뭐지?" 

"에즈민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름마저도 귀엽구나. 마치 꿈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미소녀로구나." 

"공자님과 저는 정말로 만났습니다." 

"꿈속에서 말이냐? 흐흐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즈민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자 꽃이 피어나는 듯 했다. 덕분에 파세닌은 이 소녀야말로 오래 전 자신을 고문하

고 암시를 걸었던 사람임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저‥ 바보!" 

파세닌이 겁쟁이처럼 테이블 아래로 숨어버리자 파마리나는 간단하게 외마디 감상을 외쳤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테

이블 아래에서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만약 봤다면 당장 통닭처럼 만들어 버렸겠지만. 

"초연의 혼돈, 마지막 절벽에서 울부짖는 성조여‥. 붉은 안개구름을 해치고 나와 네 울음소리를 들려다오!" 

―꾸에에엑! 

입을 오물오물 쉴 새도 없이 움직이며 주문을 외는 파마리나가 서있는 자리에서 거대한 마법원이 만들어졌다. 그리

고 손을 펼쳐들자 외마디 언령을 외치자 마법원에서는 빛기둥이 솟아오르며 한 마리 괴조가 등장했다. 

"고라키하드! 발스크의 애완동물인가?" 

법칙을 관장하는 레이모하가 지혜의 신 위즈의 오른손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파멸의 신 발스크. 발스크의 이

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마녀나 마법사들의 입에는 꼭 한  번은 등장하는 주연배우였다. 하지만 발스크

가 거론되는 주문은 대부분이 금지주문이었다. 파멸의 신에게 하사 받는 힘이 얼마나 강대하겠는가. 

피닉스가 불의 성조(聖鳥)라면 고라키하드는 마조(魔鳥)였다. 고동색의 흉측한 날개를 편 마조의 울음소리에 기운이 

약한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마녀는 마녀인가보군.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그렇게 말하는 로진스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진공의  칼날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갈 때

마다 사람들은 십 여명씩 마구잡이로 쓰러졌으니까. 

원래 마법사는 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말이다. 

고라키하드는 사실 소환자인 파마리나도 제어하기 힘든 마수였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마법사는 '역사의 고리'에

서 마법을 담당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의 머리 속에 있는 주문을 나열하면 하루 종일이 걸려도 모자를 것

이다. 

하지만 파마리나가 무리한 만큼 고라키하드는 다행스럽게도 로진스에게 위협을 주는 모양이었다. 꽤나 곤란한 표정

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파마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녀가 마법사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마녀는 주문을 영창함에  있어서 마법사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

다. 한 마디로 마녀들은 축복받은 마법사였다. 그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파마리나가 밀린다면 이것은 마녀의 자

존심 문제였다. 

그러나 파마리나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로진스가 곤란해하는 이유는 달랐던 것이다. 

'어떤 녀석을 소환할까? 그래, 괴조에 어울리는 녀석이라면‥.' 

"흐흐흐! 영원히 찾아오는 밤의 사냥꾼이여‥. 그대의 화살이 향할 곳, 여기에 마련되었으니‥" 

"마, 말도 안돼! 당신이 그 주문을 알 리가 없어!" 

파마리나는 로진스가 주문만 듣고도 소환하려는 대상을 알아챘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고라키하드라는 카드

는 잘못 꺼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와라! 그대의 사냥터에!" 

수인(手印)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로진스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뭉쳐지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홀의 천장

까지 닫는 거대한 키의 거인. 거인은 막 날아 오르려는 고라키하드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등에 멘 활을 풀어서 겨

누었다. 

밤의 사냥꾼, 이로카스는 전설에서 동물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다녔다는 마족이었다. 꼭 그는 밤에만  나타났는데 

사냥감으로 마수건 성수건 가리지를 않았다. 결국 드래곤들을 사냥하다가 반대로 붙잡혔고 드래곤들의 지배자는 이

로카스를 하늘의 별자리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사냥꾼을 보자 고라키하드는 크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묵광의 기운을 입으로  모았다. 이로카스는 희미하게 그런 사

냥감을 비웃으며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쿠아아아아! 

고라키하드의 브레스와 이로카스의 화살이 맞붙딪히고 그대로 왕궁은 날아가버렸다. 

콰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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