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00)

                                            43악장 5화

왕궁에서 들려온 천지를 흔드는 폭음소리. 수도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중앙기사대를 모두  제압한 글로디프리아 

군의 사령관, 마크렌서 자작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지금 소리를 들으셨지요?" 

"귀머거리도 들었을 거야." 

킬유시 공작은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그는 아직도 휠체어에 탄 상태였다. 로바메트 공작은 궁전에 있을 아들 놈을 

생각하고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당장 궁전으로 가야하는 게 아닌가?" 

"진정하게, 로바메트. 젠티아가 우리에게 맡긴 일은 그게 아니야. 궁전의 일은 알아서 잘 할 걸세. 자네도 그만 아들

을 믿지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 내 아들인  자네 사위처럼 그렇게 괴물인 줄 알아? 

앙! 이럴 줄 알았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보내는 게 아니었어." 

길길이 날뛰는 로바메트 공작을 보며 킬유시 공작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온화한 성격이라고 알려졌는지 궁금했다. 

그의 옆에는 데린이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는데 그녀 또한 방금 전의 폭음으로 돌아올 사람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

다. 빙그레 웃으며 킬유시 공작은 데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로바메트 공작이 말했듯이 네 남편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검사가 아니냐?" 

"그럼 전 인간하고 결혼한 게 아니란 말씀이에요?" 

아버지의 말에 데린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밝게 농담을 꺼냈다. 하하하 하

고 함께 웃어준 마크렌서 자작은 뒤에서 얌전히 보고 있는 레스난과 블리세미트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궁전의 열전이 워낙 치열한 듯 하니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이쪽은 이미 펴온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블리세미트는 레스난의 손을 잡고 막사를 나갔다. 그들도 시즈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국왕을 어떻게 잡을지 생각해봅시다." 

"그러지. 마크렌서 자작, 자네가 생각하기에 국왕의 도주로는 어떠한가?" 

이내 그들은 신중해졌다. 사실상 이번 승패가 달려있는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티아가  죽음

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가한 것은 역사의 고리와 중앙기사단의 실질적인 힘인 근위기사들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어서 가자." 

"좀 천천히 가!" 

레스난은 뛰다가 힘이 든 지 털썩 주저앉았다. 블리세미트도 숨이 차도록 뛰어왔는데  레스난이 어떻게 견딜 수 있

을까? 그녀의 상황을 다른 때라면 이해했겠지만 궁전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폭음과 빛은 블리세미트를 재촉하고 있

었다. 

"자! 어때?" 

자구책으로 그는 레스난의 다리에 회복술과 생명술을 썼다. 뛰어난 신성력에 레스난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

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진작 좀 해주지." 

"알았으니까 어서 뛰어!" 

블리세미트는 현재 신성력을 될 수 있는 한 써서는 안된다는 어떤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도 왕궁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으아― 완전히 난장판이네." 

레스난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린 궁전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을 

예상했는데 저래가지고는 바다 속에서 가라앉은 고대의  궁전과 다른 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바다 속의 궁전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그것으 그나마 지붕이라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서 

다가갔다. 

"블리세미트, 레스난!" 

"아리에!" 

레스난은 페스튼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는 아리에를 보고 크게 소리쳤다. 손가락을 뻗어서 인어의 주문을 외우자 얼

음화살이 우수수 페스튼을 향해서 날아갔다. 

"아차아차! 새로운 여인이 온 건가? 이건 또 무슨 인연이야? 하하핫!" 

페스튼은 얼음화살을 피하고 나서 레스난과 블리세미트를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갖고 싶어했던 여자가 모두 찾아오다니‥. 역시 신은 내 편이라니까." 

"신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 꼬마 사제, 너한테도 빚이 있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리에와 페스튼은 여기저기가 화상으로 엉망이었다. 아마도 방금 전의 폭발에 의해 그들도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

다. 그러나 몸놀림이 날렵하여 피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쓰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팔이 날아간 사람도 있었고 아예 상반신이 없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런대도 이렇게 싸움은 계속 되고 있다니‥.' 

아리에는 레스난에 맡겨두고 그는 시즈들을 찾았다. 

"크아아아앗!" 

흑기사와 백기사. 두 갑옷의 색깔만큼이나 두 기사의 검술도 달랐다. 바스티너는 어떻게든 자신을 막아내고 있는 자

가 젠티아말고도 또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대체 넌 누구인가?' 

"보를레스라고 하지." 

"보를레스라면 용병왕을 맞아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하는 기사‥. 그게 너란 말이냐?" 

"그 뿐만이 아니지. 너랑도 이미 한 번 싸운 일이 있다고. 사막에서의 일전 잊어버렸나?' 

"사막에서?" 

바스티너는 잠시 검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때의 꼴사납던 검사로군." 

"하하하‥ 그 때는 나였지만 이번에 꼴사납게 패배하는 자는 바로 너다, 바스티너!" 

제뷔키어가 제비처럼 바스티너가 들고있는 흑색의 검을 때렸다. 그러나  검이 두꺼워서인지 바스티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레이트 소드를 방패로 밀고 나가면서 휘둘렀다. 

"으랏차!" 

보를레스는 제뷔키어를 믿었다. 적어도 토루반이 부러지게 만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대장장이한테 말

하면 맞아죽을 생각이었다. 바스터드 소드보다도 굵기가 얇은  검으로 그레이트 소드랑 맞대결을 한다니‥. 하지만 

보를레스는 슬슬 기운을 조절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검을 감도는 빛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 제뷔키어는 바스티

너의 힘 앞에서도 빌리지 않았다. 

"조금 힘은 늘었군. 흠!"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스티너의 가벼운 기합에 보를레스는 뒤로 달리기를 하듯이 밀리기 시작했다. 

"어이! 어어어어어어어―!" 

"바보 같군. 좀더 제대로 덤비는 게 어때?" 

바위에 걸려 뒤로 아예 넘어가 버린 보를레스에게 바스티너는 시시하다는 듯이 뒤로 돌아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

은 보를레스가 '담력검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죽어보자!" 

좀전과는 속도 자체가 틀린 공격이 들어오자 바스티너도 진지해졌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거대한 검을 한 바퀴 천

천히 돌렸다. 

카가가강! 

"뭐야!?" 

보를레스는 검을 다 휘두르기도 전에 자세가 흐트러지며 옆으로 굴러야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바스티너가 말했다. 

"넌 아예 화경에 대해서 모르는 거냐?" 

"화경?" 

들어본 기억이 났다. 예전에 시즈에게서 동방검법의 묘(妙)에 대해서 조금 배울 때 시즈는 화경이라는 말을 자주 섰

다. 

"그래‥. 그거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주제에 보를레스의 공격은 다를 바가 없었다. 코웃음을  치면서 바스티너는 다시 한 번 

화경을 전개했다. 휘익하고 돌아가는 거대한 검. 그리고 휘말리는‥? 

바스티너는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휘말리지 않았다.' 

화경이라고 함은 상대의 공격의 속도를 옆이나 뒤로 받아서 공격 방향을 서서히  돌려 튕겨 내는 방어술이었다. 그

러기 위해서는 검이 원을 이루면서 회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상대의  힘에 반발하지 않는 유일한 동작이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를레스의 공격이 바스티너의 원운동에 휘말리지 않았다. 검이 닿지 않고 되돌아간 것이다. 

"화경이라는 것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지. 모든 방어와 공격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보를레스는 입을 함박만큼 벌리며 크게 기합을 넣었다. 

"하압!" 

제뷔키어가 보를레스에게 받은 기운을 빛내며 바스티너의 머리를 향해서 돌격했다. 

바스티너가 옆으로 피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제뷔키어는 바스티너의 투구를 정확하게 때렸다. 

콰직! 

"꺄악!" 

갈라진 투구가 바닥을 구르며 튀어나온 소리는 애절한 여인의 비명이었다.  넘치듯이 너풀너풀 흘러나온 감청색 머

리카락 사이로 눈물어린 여인의 눈물이 옅보이자 보를레스는 마무리를 할 생각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저기‥!" 

"죽여버리겠어!" 

바스티너, 아니 에레나는 흑검을 들어 올려 보를레스를 광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공격에 힘도 없었고 허점 투성이

었다. 그냥 슬쩍 검을 집어넣기만 해도 심장이 꿰인 채 죽어 버릴 게 분명했다. 

'정말 방금 전의 바스티너가 이 여인인가?' 

보를레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감청색 머리카락에 귀여운 얼굴은 분명히 낯에도 익었다.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엘시크로 돌아오는 도중에 잠시 쉬었던 마을에서‥. 

"에레나?" 

"닥쳐! 난 바스티너야! 바스티너라고!" 

에레나는 히스테릭하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보를레스의 공격에 머리를 맞고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워진 게 분명

했다. 

블리세미트는 당황스러워하는 보를레스가 위험하다고까지는 생각되지 않았음으로 지나쳤다. 달려가던 그의 눈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게 들어왔다. 얼른 달려가서 일으킨 그녀는 파마리나였다. 

"파마리나, 괜찮아요?" 

그녀는 마법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화상으로 흉측하게 변해있는 상처를 블

리세미트는 빨리 치료했다. 

"휴우‥ 빨리 와서 다행이었어. 조금만 늦었다면‥." 

파마리나의 티 없는 얼굴는 영원히 일그러져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

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파마리나, 정신 차려요." 

"으하하하핫! 성직자가 마녀를 안고 있다니, 특이한 광경이로구나." 

"당신은‥!" 

붉은 뱀의 사원을 부숴버린 장본인 중  한 사람 로진스를 보자 블리세미트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샘솟았다. 이빨을 

가는 그를 보며 로진스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로진스!" 

"꼬맹아, 너같은 어린애의 입에 올려질 만큼 내 이름은 가벼운 게 아니다." 

로진스는 웃음만 멈추고 가늘게 뜬눈으로 증오에 불타는 어린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파마리나가 화상을 입은 만큼 

그 또한 무사한 게 아니었다. 머리는 온통 그을려서 꼬질꼬질했고 법의도 가장자리는 찢어지고 상처에서 나온 피에 

물들어서 엉망이었다. 

그는 서있기도 힘이 든지 비틀거렸지만 입을 중얼거릴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암흑 가득한 구덩이에 피어있는 불꽃의 강이여‥. 여기에 나타나‥ 으윽!" 

로진스는 주문을 맺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파마리나의 지팡이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그는 쓰러졌다. 

"너 바보냐‥?" 

블리세미트는 파마리나의 음성에 따라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주먹이 보였다. 

"윽! 왜 때리는 겁니까?"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파마리나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로진스에게도 질 수  없었지만 이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블리세미트에게 소리쳤다. 

"방금 전에 로진스가 외우던 주문은  용암을 불러 일으키는 주문이었다고!  그걸 다 외우도록 놔두면  어쩌려고 그

래?" 

"죄, 죄송해요." 

"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보도록 해." 

"하, 하지만‥." 

"어서!" 

파마리나의 소름끼치는 고함에 블리세미트는 화들짝 놀라서 뛰어갔다. 안그랬다가는 마법으로 얻어 맞을 것만 같았

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파마리나는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조용히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난장판 구석에서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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