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악장 1화
엘시크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노르트 평원을 가로지르다보면 에메랄드를 뿌려놓은 것처럼 푸른 멜도아 강이 구
불구불 흐른다. 멜도아 강의 뱃사공과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보면 제플론 주변에서는 하나 뿐인 나무의 밀집지, 멜라
누 산이 여름의 태양 빛을 가득 머금은 생명의 빛깔로 환영한다.
소년처럼 조그만 청년은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가볍게 동산에 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에 은색의 머리카락과 왼
쪽 소매가 격렬하게 나부꼈다. 뒤를 쫓아오던 여인이 숨이 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즈‥. 좀 천천히 가‥."
"아리에, 그만 둬. 저 녀석 지금쯤 마음이 들떠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걸‥."
여인의 뒤에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왼쪽 어깨가 아파서 끙끙거렸는데‥."
못내 걱정을 덜 수 없는지 여인은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청년의 펄럭이는 왼쪽 소매가 자꾸만 신경에 걸렸
다. 그러나 거구의 사내는 팔짱만 낀 채 동산 위에서 팔딱거리며 웃어대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에, 빨리 와요! 내 저택이 보인다고요!"
고향의 바람은 왠지 모르게 시원하다. 나무 사이로 호수를 넘어 보이는 푸른 지붕의 아름다운 저택을 바라보며 시
즈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저게 시즈의 저택?"
직접 실물을 보자 아리에도 좀 전까지의 걱정은 까맣게 잊고 우두커니 서서 물었다. 궁전도 아닌 자그마한 저택의
아름다움에 취하다니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주변의 나무들과 호수들이 어우러져 멜라누 산이 거대한 궁
전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상한데? 오랫동안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저택 주위가 너무 깨끗해."
저택 앞까지 도착한 일행 중 보를레스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을 바라보니 시즈도 이상한 기
색이 역력했지만 그와는 뭔가 달랐다.
'레소니‥.'
막 문을 열면 낑낑대며 집안을 치우다가 땀을 훔치며 그녀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들어가 보죠."
찰칵!
문은 기름이라도 칠한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스르르 뒤로 나타나는 저택의 거실. 시즈는 멍하니 넋
을 잃을 만큼 모든 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지막 날 그가 마시고 나갔던 찻잔마저도 탁자 위에 그
대로 놓여있었다. 먼지마저도 쌓이지 않은 게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시즈는 무심결에 옆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시즈?"
"후우‥."
붉은 눈을 깜빡이며 물어오는 아리에의 모습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퍼뜩 놀라서
되물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왜 금발의 소녀 대신에 검은 단발머리 여인의 모습에 안심할 것일까?
갑자기 뚫어져라 시즈가 바라보자 아리에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불안한 듯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자신이 그려져 있는 검은 동공, 바람에 날릴 듯 애처로운 허리에 당당하게 꽂혀있
는 단검들.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도 옆을 떠나지 않았던 여인과의 시간들이 떠오르자 시즈는 의문 대신 미소
를 품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행동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저벅저벅하고 걸어간 그는 1년 반 전,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
아, 들었던 찻잔을 들었다. 막 내온 듯 김이 폴폴 솟는 허브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그는 말했다.
"좋은 환영 인사로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2층에서 한 남자가 절제된 걸음걸이로 걸어 내려왔다. 어떤 귀족들보다도 더욱 귀족 같은 모습의 사내는 시즈의 기
억 속에 단 한 명뿐이었다.
"지키고 있어준 건가요? 케츠타."
"저 뿐만이 아닙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2층 난간 위로 눈이 말똥거리는 머리들이 송송 튀어나왔다. 그들은 무섭게(?) 변한 시즈의 모습
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달려와서 안겼다.
"주인님!"
"피린? 피린인가요?"
레소니를 빼어 닮은 소녀가 마지막으로 안기는 순간 시즈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물었다. 그 천방지축이던
꼬마악마가 이렇게 크다니‥. 소녀에게 2년이라는 시간은 꽤나 길었던 모양이었다.
"응. 제플론의 높은 사람이 와서 주인님이 돌아올 거라고 말해줬어. 히히‥ 주인님이랑 오빠가 없는 동안 우리는 계
속 저택을 치우며 기다렸어."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피린은 눈을 꼭 감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시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금발을 헤
집어놓자 피린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피린이 오빠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틀림없이 레소니일 거라고 생각하자
시즈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문을 열기 전가지의 시즈였다면 분명히 레소니의 거론을 망설였을 것이다. 그
러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린‥. 레소니는‥."
"아, 알고 있어. 헤모 사제님께서 오셨다 가셨거든. 오빠가 죽었다니 믿기지는 않지만 주인님을 감싸고 죽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빠는 정말 주인님을 좋아했거든."
피린이 고개를 떨구고 슬픈 기색을 보이자 그녀를 따르는 꼬마들도 우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피린은 눈물이 완전히 닦이지 않은 눈을 들고 밝게 웃더니 시즈를 잡아끌었다.
"자자‥ 어서 가자고, 주인님. 다들 기다리고 있어."
시즈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용히 그들이 하는대로 놔두었다. 이윽고 거실의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움찔했다. 식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던 것이다. 세이탄의 촌장 할아버지, 브라트니를 비롯한 미장이들, 기
대에 찬 눈을 빛내고 있는 여인들과 사내들, 마법원의 수련생인 피르트와 에리나.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하는 생각에 시즈는 잠시 굳어버렸다.
그 때, 우두커니 입구에 서있는 그를 누군가 강하게 밀었다.
"어서 들어가라고! 내가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빵이 식어버리기 전에."
"로플레‥."
자칭 빵의 마법사 로플레는 두툼한 이빨을 보이고 웃었다. 그가 오늘을 위해 어젯밤 밤을 새며 밀가루를 빚었다는
하얀 증거가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었다. 로플레는 시즈와 아리에, 보를레스를 테이블의 가운데 앉혔다. 그리고 건배
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 미성년자인 피린 앞의 포도주잔을 뺏아들고 외쳤다.
"자아‥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 건배!"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에 댔을 때 피린은 울상을 지으며 쥬스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