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00)

                                            45악장 3화

보를레스는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축 처져  걸어가던 이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지

경이었다. 그가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아스틴에서 왔다는 사절 일행 모두가 새로운 인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를레스!" 

"네메이나?" 

왠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달려오며 이름을 부르자 보를레스는 의아했다.  엉겁결에 생각나는 이름을 외치기는 했지

만 기억 속의 '네메이나'는 지금의 소녀처럼 우아하지도 기풍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부정도 하지 않고  달려

와 긍정하듯 그의 품에 안겼다. 

"보를레스, 많이 컸네?" 

"역활이 바뀐 것 같지 않아?" 

반문하면서 보를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말괄량이  네메이나가 이렇게 어여쁜 숙녀로 변신을 하다니‥. 

천천히 걸어오는 유레민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보를레스." 

"아, 그, 그렇군요. 여, 여전히 아, 아름답습니다." 

더듬더듬, 완전히 토마토처럼 변해서 손짓발짓하는, 기이한 보를레스의 모습에 네메이나는 뭔가 알았다는 듯 이채를 

발했다. 다가오던 유레민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 엘프니까요. 그런데 어디 몸이 편찮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보를레스는 혹시‥." 

생글거리며 입을 여는 네메이나. 보를레스는 순간 불길한 예상에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어, 어서 가시죠. 시즈가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하지만 음악회는 저녁때라고 하던 걸요!?" 

"아, 아, 네. 그, 그러면 그, 그, 그, 그 때 보죠." 

뻣뻣하게 보를레스는 몸을 돌렸다. 굳은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유레민트는 네메이나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네메이나는 이유를 아나요?" 

"훗‥. 글쎄요." 

귀족집 소녀처럼 고아하게 차려입은 그녀였지만 눈웃음만은 산적  시절, 그대로였다. 만약 그녀의 웃음을 보았다면 

보를레스는 몸서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고 유레민트만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네메이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옷, 옷, 옷!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마을을 벗어나서 숨이 차도록 오두막으로 달려온 보를레스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옷장을 뒤져가며 난리법석을 떨었

다. 검술을 수련할 때처럼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에 포즈를 잡아보는 그를 보며 아리에는 시즈에게 물었다. 

"보를레스가 왜 저러지?" 

"하하, 그에게도 떠나갔던 봄이 오려나보지요." 

"흠‥." 

턱을 한 번 쓰다듬은 아리에는 갑자기 장난기를 가득히 얼굴에 띄우고 보를레스에게 걸어갔다. 

"보를레스, 옷을 고르는 모양인데 내가 골라줄까요?" 

"괜찮아!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래요? 혹시 여자한테 잘 보일 거면 같은 여자가 골라주는 게 나을텐데‥." 

보를레스는 역시 아리에의 꾀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 아리에는 한 때 귀족이기도 했으니까. 기풍 있는 옷차림을 골라줄 거야.'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판단을 했었는지  후회했다. 아리에는 들고 나온 옷을 보를레스에게 입히고 

말했다. 

"아주 좋아! 보를레스한테는 이런 옷이 제일 잘 어울려요. 여자들도 맥을 못출 걸." 

"저, 정말로 여자는 이런 옷을 좋아해?" 

"물론이지.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아니면 몰라요." 

손가락을 꼽고 진지하게 말하는 아리에와는 달리 나무 밑에 앉아서 연주할 곡목을 고르고 있던 시즈는 웃음을 참느

라 아주 고생인 눈치였다. 끅끅대며 대며 언덕을 굴러가는 시즈를 무시하는 아리에의 진중한 표정에 보를레스는 다

시 한 번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이윽고, 공연 시간이 되어 호객꾼을 맞고 있는 보를레스가 나타날 시간이 되자  로지 마을의 사람들은 슬슬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귀족 방문객 중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유레민트 일행이었다. 행여라도 무슨 실례

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큰 벌을  받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보를레스가  어두운 나무 사이에서 

보를레스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풋하고 웃음을 토했고 잠시 후에는 깔깔대고 웃어댔다. 

네메이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수풀쪽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나간 듯 했고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사람은 유레민트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 또한 재미가 있는지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우하하하핫! 그게 뭐야? 보를레스! 입을 옷이 없어서 팬더의 복장이라니!" 

사람들이 웃어대는데도 비롯하고 보를레스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전의 보를레스의 인형  같은 걸음은 

상상이 가지 않는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가면이나 분장은  얼굴을 가려준다는 이유로 또다른 성격을 이끌어 낸다. 

팬더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보를레스는 우렁차게 말했다. 

"그럼 실리미엔 에이아의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멋진 목소리군."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유레민트를 수행하고 온 귀족 기사나 수행원들도  감탄했다. 하지만 끝에는 작은 피식거

림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게 더 우껴. 푸후후훗!" 

웃음을 무슨 행진곡으로 아는 걸까? 보를레스는 유레민트에게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유레민트님, 이름높은 학자이자 숲의 귀족인  그대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이  우스꽝스러운 삐에로에게 주시겠습니

까?" 

"물론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고결한 유레민트의 손이 팬더의  두툼한 팔을 잡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안 어울리는 

커플이 있다니! 그러나 엘프는 주위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 종족이었고 유레민트는 특히 그랬다. 그녀는 사람들에

게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나온 보를레스의 팔에게서 무척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온몸을 기댔

다. 몽클몽클한 유레민트의 감촉에 보를레스는 내심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와아아아앗!' 

사람들을 뒤에 두고 팬더 한 마리가 별의 미궁으로 걸어 들어간다. 얼굴이 붉어진 그대, 그대의 이름은 '핑크 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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