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2화
레이모하 교단이 따로 전투집단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소레인 교단은 전투가 일어나면 사제들까지도 투사로 변했
다. 게다가 사막민족은 기본적으로 용사 사상이 숨쉬고 있어 죽인다고 해도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교를
그냥 두지 않는 배타적인 레이모하 교단도 소레인 교단만큼은 건들일 수 없었다.
명성이 전하듯 신전은 무척이나 삼엄했다. 요전에 얼굴을 익혔던 치료신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리
에는 들어설수록 소름이 돋았다. 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정말 거대하군. 소레인의 신전은 보통‥."
검소했다. 볼케이스는 레이모하의 엘시크처럼 자원이 풍족한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해왔기에 소레인의 뿌리가 깊고 넓게 퍼졌던 것이다. 보를레스는 지금 들어서는 신전의 긴 복도만
봐도 로지의 신전은 소레인, 아니 볼케이스의 모습과 상반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를 맡았는지 치료신관은 약간 얼굴을 굳혔다.
"전의 신전이 너무 낡았었습니다. 온통 냄새가 나고 손님이 앉을 만한 자리에는 물이 고여있었죠."
이윽고 대전에 도착했다. 족히 100여명이 들어찰 대전은 휘황찬란한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아리에는 양탄자에서 부
드러움보다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바늘방석을 깔아둔 것처럼 불편했다. 옆에 서있던 시즈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오셨군."
안에는 신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30여명 모여있었다. 그리고 대전 가장자리마다 신전 무사가, 대사제의 뒤로는
신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보를레스가 긴장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치 심판의 장이라도 열린 것 같군."
"어서 오십시오. 실리미엔 에이아, 여러분."
연락을 받았는지 단상 위에 서있는 사내가 양손을 펼치고 그들을 맞이했다. 치료신관이 걸어나가 무릎을 꿇고 말했
다.
"대신관님의 부르심대로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러가 있으세요."
대신관은 고작 40대 정도로 보일 만큼 젊었다. 실제로 젊은 나이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
어나오고 볼이 쏙 들어간 걸로 볼 때, 사제복 뒤로 숨겨진 그의 몸은 부지깽이를 연상시킬 마른 몸이라고 추측됐다.
부지깽이 대신관은 실리미엔 에이아를 단상 위로 불렀다.
"여신의 유혹만큼이나 달콤한 노래와 춤을 보인다는 실리미엔 에이아. 그 명성이 나오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유레민트와 아리에의 미모를 보고 얘기한 것이다. 아리에는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욕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내심
칼을 꽂고 싶었지만 겉으로 미소를 띄우고 답변했다.
"지나친 칭찬이 부담스럽습니다."
피식 웃은 부지깽이는 몸을 신도들 쪽으로 휙 돌렸다. 본론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실리미엔 에이아가 음유악단이니 노래를 들어야겠지만 오늘은 예외입니다. 그대들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부터 실러오나의 권능이 실리미엔의 치료술에 뒤진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소?"
"몰랐습니다."
"우∼!"
갑자기 신도들이 야유를 보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신전의 동상들처럼
싸늘했다.
"몰랐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한 번 시험을 해보고 싶었소. 그대들의 치료술이 얼마나 뛰어난 지 말이오."
부지깽이의 손짓에 한 사람이 실려 나왔다. 연신 신음을 터뜨리는 사내를 가리키며 부지깽이는 말했다.
"아침에 실려온 환자지. 다리가 아픈 모양인데‥. 그대들이 고쳐줬으면 해."
환자라고 지칭한 사내를 유레민트는 다가가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사내가 가짜로 만들어진 환자라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리의 모양은 부러진 것도 뼈가 빠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접질린 정도로 신전에
비싼 돈을 내고 치료를 받을 리는 없을 것이다. 헌데 왜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나오는가.
환자라는 사내는 무척이나 연기력이 부족했다. 아마도 보를레스였다면 훌륭히 환자력을 해냈을 텐데‥. 보를레스를
힐끔 쳐다본 유레민트는 시즈에게 다가갔다.
"시즈님도 알 수 있죠?"
"환자가 엄살을 떨고 있다는 것 말입니까?"
"역시 눈치채셨군요."
시즈는 눈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까닥하며 답변을 대신했다. 유레민트는 그가 어째서 여유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했
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꾀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엘프의 약지식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멀뚱히 서있는 유레민트를 부지깽이가 재촉했다.
"치료해보시오. 왜 그렇게 서있지? 설마 치료할 수 없다는 건 아니겠지?"
대신관은 비웃음을 자랑이라도 되는 양 짓고 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유레민트의 온화한 마음에서도 오기가 치
솟았다. 꺽어 버리고 싶다.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들었다. 긴 금발이 철렁이며 내리 앉을 때 그녀는 걸어나갔다.
"많이 아픈가요?"
"아파! 아파! 날 도와주시오."
"다리의 어디가 아픈가요?"
"모두, 다리가 모두 아파."
유레민트가 손가락을 뻗어서 다리를 만졌다. 그러자 곧바로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이런 정말 많이 아프신 모양이네요."
사내의 눈빛에서 멸시의 눈초리를 유레민트는 보았다. 그에 대응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손에 힘을 가했다.
우두두둑!
"으악! 으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등이 새우등처럼 꺽였고 입에서는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놀란 신도들이 야유를 멈췄다. 유레민트의 가냘픈 손가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갔다.
우둑! 과드드득!
"으악!"
"뭐 하는 거야?"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신전의 무사와 기사들이 유레민트에게 창을 들이댔다. 하지만 더 빠른
사람들이 있었다.
"치료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치료신관이 언급했었지만 실리미엔 에이아의 몸놀림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은발 청년의 소매와 머리
카락은 바람이 없는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관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마법사인가‥? 잘못 건들인 게 아닌지 걱정되는 군.'
마법사는 괴팍하다. 겉보기에는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우선 유레민트라는 엘프만 봐도 만만치 않을 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덩치가 큰 검사와 단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여인 등 이들은 균형 잡힌 모험 파티의 전형을 이루고
있었다. 운도 없지. 내심 쯧쯧하고 혀를 찼다.
다시 한 번 시즈가 입을 열었다.
"치료하는 중입니다. 창을 거둬 주십시오. 저희에게 환자를 맡겼다면 끝까지 봐주십시오, 대신관님."
은은한 미소는 시즈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느끼게 하는 표정에서 대신관은 절대적인 위험을
느꼈다.
"내 다리, 내 다리!"
"남자가 엄살이 심하군요."
유레민트는 은근히 사내에게 속삭였다. 아픔을 나눌 듯이 끌어안고 은밀히 속삭이는 모습은 보를레스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내가 손을 잡으면 당장 일어서세요."
"하지만 당신이 내 다리를‥."
"더 치료해 드릴 수도 있답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방긋 웃는 모습은 사내에게만 살인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유레민트의 손이 사내의 팔을 잡고
끌어 올렸을 때, 신도들을 비롯한 신관들의 눈은 경악에 물들었다. 벌떡 일어난 사내가 눈물어린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서진다. 내 다리! 부러진 줄 알았는데‥."
유레민트가 시즈들을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씨익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쑥 올렸다.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난 생으로 불구가 될 뻔했어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사제님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치료신관이 사내와 거친 단독면담을 하고 있을 때, 실리미엔 사람들은 대신관과 비밀스런 이야기를 진행 중이었다.
"치료비를 받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우선적으로는 내가 나섰지만, 신전 말고도 많은 약사들이 당신들을 질시하고 해하려 할거요. 실리미엔이라
는 이름은 예전부터 아름다운 노래로 유명했으니 어쩌면 대륙 전체에 퍼질지도 모르지. 그러면 평민들은 짐을 싸들
고 병을 고치기 위해 그대들을 찾겠지요."
"‥‥."
"그대들이 무료로 치료를 한다는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오. 다만, 치료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 바라오."
"신전도 포함되는 사항인가요?"
유레민트의 물음에 대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쑥 시즈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하시오."
"우리는 곧 여기를 떠날 겁니다."
"뭐!?"
시즈의 얘기는 보를레스와 아리에도 들은 바가 없었음으로 모두 반문했다. 시즈는 돌아가서 이유를 알려준다고 말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단, 치료비를 조금만 싸게 받아주십시오. 적어도 다른 대륙에서 저희를 찾아올 여행비보다는 싸게 말입니다."
대신관은 잠시 고민했다. 아마도 돈을 계산하고 있는 거겠지. 보를레스는 역겨움에 당장이라도 성스러운 신전을 나
가고 싶었다. 이윽고 대신관은 한 신관을 불러서 몇 마디를 전달했다.
"자아‥ 그대의 말대로 했소."
"우리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선 실리미엔 에이아를 데리고 왔던 신관이 밖으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시즈 일행은 제각기 의미를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보를레스는 수풀 사이에 돌을 휙 던지고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숨어서 기다릴 거 없지. 자랑스러운 신관 기사, 여러분."
"눈치를 못 챘다면 편안히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길 양쪽에서 10여명 가까이의 신전 기사들이 걸어나왔다. 보를레스가 던진 돌을 맞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기사를
선두로 한꺼번에 검을 빼들었다.
"여자들은 다치지 않게 해. 뒷맛을 봐야하니까."
"그럼 알지! 남자들은 죽여버려!"
진지한 작전회의를 마친 기사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방심은 없었다. 대전에서의 몸놀림으로 충분히 위협적인 존
재임을 알아뒀으니까. 특히 은발의 청년이 마법사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전해졌기에 그들의 공세는 우선적으로 시즈
에게 몰렸다.
"내가 가장 쉬워 보입니까?"
멋쩍게 긁적이는 시즈의 옷자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조금만 내밀면 그의 머리에 검을 꽂을 텐데, 하면서도 기
사들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뒤로 밀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뒤로 가서 구경이나 할까요?"
아리에가 유레민트를 잡아끌었다.
"아, 네."
그녀의 손에 매달린 인형처럼 유레민트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유레민트에게는 시즈가 제대로 마법을 쓰는 광경이
처음이었다. 보를레스는 일찍이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일행이 마법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시즈의 미소는 더 가늘어졌다. 솔직히 신전에서 건물과 신관들을 죄다 하
늘 높이 날려버리고 싶었다. 어딘가에 풀어버릴 욕망을 참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너무나도 고마웠다.
신이 난 그를 보며 보를레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인데!? 아리에, 좀 더 뒤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죠. 유레민트도 어서 뒤로 오세요."
"저, 저기‥. 저건‥."
"보면 몰라요? 마법을 쓰고 있어요. 시즈의 마법은 광범위하니까 조심해야 되요."
"마법‥!?"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며 유레민트는 반문했다. 영창도 하지 않았고, 드래곤들의 용언에도 빠질 수 없다는 시동어
도 없었다. 마치 시즈가 원하자 바람이 일어난 것처럼‥.
아리에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레민트는 마법의 종족이라면서 왜 몰라요? 저건 의지의 마법이라고요."
"의지의 마법!? 그런 마법은 없어요."
"뭐라고요!?"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서로를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보를레스가 그 때, 신음성에 가까운 음성으로 작
게 외쳤다.
"시작한다. 조심해!"
시즈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날 좀 도와주겠어? 아무래도 혼을 내줘야 할 것 같다. 저 의복을 벗겨버려."
뻗어 나간 바람의 주먹이 한 기사의 몸통을 때렸다. 당장에 옆구리의 갑옷이 찌그러졌다. 어떤 바람은 칼날을 담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느낀 순간에 갑옷 전신에는 칼로 수십 번을 긁어놓은 듯 흠집이 났고, 두 번 쓸고
지나가자 길게 상처가 났다. 그리고 세 번 지나가자 기사들은 붕 떠서 수풀에 처박혔다.
"후우‥. 대신관님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을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해줘요."
얼마 전까지 갑옷이라고 불렸던 쇠의 집결체는 걸레처럼 찢어진 상태였다. 기사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둥지둥 기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보를레스가 물었다.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왜 그냥 보낸 거지? 저들은 신전의 기사들이야. 타락천사나 다를 바 없다고."
"저들은 신전 기사가 아니에요. 신전의 전사나 무사라면 몰라도 기사가 되려면 소레인 교단의 시험을 받아야 해요.
용자를 숭배하는 나라의 종교에요. 기사를 뽑는 시험이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전 기사는 무척 귀할 텐
데 이런 벽지에 10여명이 넘는 신전 기사가 있을 턱이 없죠. 저들은 단순한 용병이에요."
"그렇구나. 그런데 시즈."
방금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상쾌한 표정을 짓는 시즈에게 아리에는 손가락을 꼽으며 물었다.
"꼭 떠날 필요가 있어? 마치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사람같아."
"계획하고 있었어요. 북쪽으로 떠날 계획을‥."
"북쪽이라면 빙하의 대지를 말하는 건가요?"
유레민트는 안색을 달리하며 물었다. 별의 미궁만큼이나 오지로 꼽히는 빙하의 대지는 결코 길을 잃어서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춥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엇 때문에 빙하의 대지까지 가야할까, 생각하는 유레민트는 곧
시즈의 한 마디에 수긍했다.
"색다른 곳일 거 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즐겁지 않나요?"
"재미있겠군."
보를레스는 단순하게 시즈의 마수에 걸려들고‥.
"추워 죽을 것 같은데 뭐가 재밌어?"
아리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가장 눈을 빛낸다. 그렇다면 유레민트는?
"후우‥. 고용된 몸이 뭘 가리겠어요!?"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한 달여만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