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00)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4화

시즈는 보를레스와 함께 강변으로 밀려온 얼음을  끌어올렸다. 얼음의 배라니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즈의 

계획은 언제나 기상천외했다. 이번에도 믿어보는 수밖에. 

"너무 크군요. 보를레스, 자를 수 있겠어요?"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시즈가 묻자 보를레스는 단순하게도 금방 달아올랐다. 찬 바람 속에서 투덜대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옷을 벗어 던지고 상반신을 드러낸 보를레스는 제뷔키어를 잡고 우뚝 섰다. 

"멋져요. 보를레스." 

"으헤헤헤‥." 

천군만마를 제압할 기상을 엿보이던 그의 모습도 유레민트의 칭찬에는 맥을  못 추는가. 머리를 긁적이던 보를레스

는 아리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안색을 굳히고 검을 들었다. 

"이 정도 얼음은 말이야‥. 가! 뿐! 하다고!" 

츄악! 

사람만한 얼음을 베어낸다는 것은 검술가들에게 최고의 경지로 통했다. 즉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광풍의 검

사'라는 이름으로 대륙 3대 검사의 뒤를 잇는 유망주로 떠오른 보를레스는 단숨에 얼음을 잘라냈다. 우쭐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시즈가 스쳐지나갔다. 

"음‥. 아주 잘 잘라졌군요. 대단해요." 

"왜, 왠지 당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보를레스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시즈는 뜨거운 바람을  이용해서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점차 배의 모습을 드러내는 얼음을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눈을 반짝이며 주시했다. 

"이만 하면 됐나?" 

그럴 듯하게 되었나 싶자 이번에는 차가운 바람을 불러 다시 얼음을 얼렸다. 

"이거 미끌어지지 않을까 모르겠군." 

보를레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로 오르던 아리에가 뒤로 벌렁 뒤집어졌다. 시즈의  손이 굳건히 뒤를 받치지 않

았다면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얼굴이 새 빨개진 아리에는 시즈의 팔을 꼭 부여잡고 위로 올랐다. 

"고, 고마워." 

보를레스는 유레민트도 손을 잡고 오르길 내심 바랬지만 엘프의 날렵한 동작은 트집잡을 곳 한 점 없이 가볍게  배 

위로 안착했다. 

"그런데 돛이나 노가 없잖아?" 

"돛이야 만들면 되잖아요?" 

천연덕스럽게 시즈가 말하자 보를레스의 몸에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당장에 손

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옷을 벗어서 돗을 만들자는 거라면 절대로 거부하겠어. 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었다가‥." 

"아까 윗통을 벗은 보를레스는 정말 멋졌습니다. 그렇죠? 유레민트." 

넌지시 던지는 시즈의 물음에 유레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보를레스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핫! 그냥 노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어디에 노를 만들 나무가 있다는 거야?" 

아리에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나무는커녕 갈대로 보이지 않았다. 

"배가 얼음이니 노도 얼음으로 하죠." 

시즈가 손을 강물에 손을 담갔다가 꺼내자 그 궤적을 따라서 물이 이끌려나오며 노의 모양으로 얼어붙었다. 유레민

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런 마법은 들어본 일이 없어.' 

시즈는 왼팔을 잘라낸 이후,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할 일이  없었다. 조용히 생각만 해도 의지의 마력이 용솟음치며 

온몸을 휘감았다. 

"차갑잖아." 

"그럼 옷을 벗어요." 

노를 건네받은 보를레스는 잠시 투덜거렸지만 이어진 아리에의 핀잔에 얌전히 물살을 헤쳤다. 시즈도 함께 노를 젖

자 얼음의 배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음의 노가 녹을 때면 시즈는 다시 물에서 새로운 노를 꺼냈다. 

"시즈, 물에서 바로 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배도 만들 수 있지 않았어?" 

문득 의문이 솟은 보를레스가 물었다. 

"글쎄요‥." 

시즈는 알 수 없는 대답으로 흐릿한 여운을 남기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강물의 빙산처럼 희미한 미소 속으로 거

대한 의미가 숨겨졌을 듯해 보를레스는 못마땅했다. 

"노는 형태가 복잡하지 않지만 배는 복잡하죠. 만들려면 심력이 제법 소모되거든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즈가 설명했다. 그제서야 보를레스는 크게 웃어대며 시즈의  은발에 손을 넣고 마구 휘저

었다. 

"하하하핫! 진작 말을 하지." 

"차갑습니다, 보를레스." 

얼음을 잡던 손이니 얼얼할 만큼 차가울 수밖에. 더 이상 얼음을 잡고 있다가는 동상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에 두 남자의 동작은 힘차고 빨랐다. 

"조금만 더 힘내요." 

아리에는 약간이라도 힘이 되려는지 손으로 차가운 강물을 저으며 외쳤다. 

"으라차! 으으으으라차!" 

멀게만 느껴지던 건너편도 슬슬 다가왔다. 하지만 배는 곧 멈춰야 했다. 그들이 육지라고 생각했던 곳은‥. 

"이거 얼음이잖아. 강이 얼어붙은 거야." 

그러고 보니 열심히 힘을 쓰던 두 사람은 느끼지 못했지만 여인들은 갑자기  새어드는 차가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나마 양털이 보온을 충실히 해준 덕에 당장 동태신세는 면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죠." 

"얼음이 아래로 꺼져버리는 거 아니야?" 

"이 상태로 더 이상 나갈 수도 없잖습니까!?" 

할 수 없이 얼음 위를 위태롭기 시작한 일행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더해가던 보를레스의 야

성적인 본능에 무언가 걸렸다. 

콰직! 

뒤를 돌아본 시즈의 안색도 얼음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들이 타고온 배가 부딪힌 곳부터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

이다. 서로의 얼굴을 한 차례 바라본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뛰어! 뛰어!" 

그들의 뒤를 먹이를 발견한 북극곰처럼 얼음의 이빨이 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