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00)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5화

하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그 충격에 얼음이 갈라지고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뇌리에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이

미 다리가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앗!" 

"아리에!" 

흙이 엿보이는 육지에 거의 도달했을 쯤이었다. 사실 얼음을 달린다는 게 얼마나 위태로운가. 지금까지 넘어지지 않

고 달려온 것도 용한 일이었고, 행운이었다. 그런데 행운이 다했는지 아리에는 시즈의 손을 놓치며 바닥에 미끄러졌

다. 

균열은 입을 벌려 아리에를 낼름 삼켜버렸고 시즈도 따라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떻하죠?" 

"시즈라면 아리에를 구해서 나올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아리에가 시즈를 구해서 나올 지도 모르지. 우리까지 떨어지

면 짐만 될 뿐이니까!" 

육지에 다다른 그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까마득하게 깔려있던 얼음이 부서지는 광경은 마치 대지가 무너지는 듯

했다. 

쿠르르르르‥. 

보를레스의 기대대로 시즈는 아리에를 안아 들고 물에서 걸어나왔다. 매우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레민트가  얼

른 아리에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피부가 백옥처럼 창백해져 아리에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물에 빠졌을 때, 차가움에 놀라서 다리에 쥐가 난 모양입니다." 

"마을에 들렸을 때 모포를 많이 가져온 게 다행이었어. 아리에의 옷을 갈아 입혀야 하니까 모두 눈 돌려요." 

유레민트의 날카로운 말에 시즈와 보를레스는 얼굴을 붉히고 돌아섰다. 물이  뚝뚝 흐르는 시즈를 보며 보를레스가 

말했다. 

"너도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짧게 몸을 떠는 게 시즈는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참기보다는  추위를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는 떨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몸을 긴장을 풀면 떨지 않는다. 추위에 저항하기 위해 떨리는 것이니‥. 그러나 작은 

저항을 포기하여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여 그의 몸이 얼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더욱 위험할 것이다. 그 만큼 그

에게 아리에가 소중하다는 의미였다. 시즈는 떠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에서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을 겁니다. 이토록 추운 곳이니 말이죠." 

옷을 바꿔 입은 아리에를 등에 업고 시즈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의 대지에서 전신이 물에  젖은 이상 정신을 

잃은 상태로는 20분도 견디지 못했기에 시즈는 무척이나 급했다. 옷을 적신 강물이 땀으로 착각될 정도로 허둥거렸

다.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인 세계 그 안에도 안식처는 분명히 있었다. 우클자인  강에서 북쪽으로 이백여 걸음을 옮겨 

넘은 언덕 아래로 투명한 도시가 보였다. 시즈 일행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음의 성, 타이즈벡." 

타이즈벡. 얼음의 대지에서 유일하게 대륙 사람들에게 알려진 마을이자, 도시였다.  여기저기가 색다른 생선과 고기

를 교환하느라 사람들이 붐볐다. 그 중에는 어린애도 있었고 젊은이 들이 태반이었다. 

"그래, 물에 빠졌단 말이지. 어서 이쪽으로 오시게." 

몇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이방인의 방문에 장년의 사내는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아리에의 모습을 슬쩍 바라본 

그는 얼음 속에서 상당한 연륜을 쌓은 탓인지 금새 두꺼운 담요와 곰의 가죽을 내어주었다. 

"자아, 한 잔씩 들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한 잔의 푸른 색 액체를 권했는데 향긋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냄새로 볼 때 독한  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리에의 몸 주위에 공기를 아주 느릿하게 돌리고 있던  시즈에게도 사내는 직접 술잔을 가지고 

갔다. 

"자네도 마시고, 그 아가씨가 깨어나면 한 잔 주게. 많이 마실 필요는 없어." 

'카일이드'라는 이름의 푸른 술은 붉은 뱀의 사원에서 사제들이 마시는 전갈의 독술,  롤큰에 비할 만큼 독했다. 하

지만 혀끝에 짜릿하게 감도는 맛이 감미로워 보를레스는 다시 한 잔을 찾으려 했다. 

"그만 두게. 카일이드는 중독성이 있어. 내가 준 양이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양이네. 더 이상은 과할 뿐이야." 

사내가 말했을 때는 이미 보를레스의 입에 카일이드의 술병이 거꾸로  꽂힌 후였다. 유레민트는 순식간에 나자빠진 

보를레스를 몇 번 깨워보다가 포기했다. 

아리에는 2시간이나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감기는 피할 수 없었고, 그녀가 깨어난 뒤 쓰러진 시즈와 함께 

사이좋게 자리에 눕게 됐다. 

과분한 대접에 유레민트와 보를레스는 어쩔 줄 몰라했지만 사내는 신경쓰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륙에 존재한다는 숲의 엘프님." 

"제 이름은 유레민트에요." 

"네, 유레민트. 전 르베븐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이토록 유레민트에게 정중했던 이유는 얼음 밖에  없는 곳에서는 숲을 동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무를 키울 수 있다는 엘프는 그들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무가 필요하다고요?" 

"나무가 아니라도 먹을 수 있는 풀이 부족합니다." 

르베븐은 뛰어난 사냥꾼인 동시에 얼음의 도시의 유일한 약사이기도 했다. 그는 어쩌다가 대륙에서 온 이방인을 만

나서 그들의 서적을 보고 작은 관심을 가진  게 인연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약사로 내몬  근본적인 원인은 얼음의 

대지에는 불치병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20세까지는 신체 능력이 좋던 청년들이  20대 후반이 가까워지면 급속히 늙

고 허약해짐이 바로 그것이다. 관절이 약해지고 잔병이 많아지며 후일은 작은 감기에 걸려서 사망한다. 

"그래서 노인은 보이지 않았던 거군요." 

아리에의 중얼거림에 르베븐은 쓴웃음을 지었다. 타이즈벡에서 40대에 가까운  르베븐은 신선이나 다름없는 나이였

다. 사람들은 그저 그를 특이한 체질이라고 보았지만 장본인은 오히려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얼음 사이에서 

가냘프게 살아있는 식물들을 보면 뜯어서 씹곤 했는데 그것을 바로 해답이라 보고 있었다. 

유레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들이 약과 의술에 뛰어나다고 해도 얼음의 대지에서 일어나는 질병까지 알기에

는 부족했다. 그 때, 뜨거운 이마를 짚고 몸을 일으킨 시즈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관절의 병은 풀을 먹어야 치료되는 게 맞을 테니까요." 

"확실한가?" 

르베븐의 기대에 찬 확인에 시즈는 미소만 지었다. 솔직히 그도 확실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지식일 뿐, 실제

로 얼음만 있는 대지에 온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머쩍은 그의 미소를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르베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유레민트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제가 마을에 작은 나무를  하나 심어두었습니다. 거기에 엘프님의, 유레민트님의  힘으로 숲의 축복을 

조금이라도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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