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6화
유레민트는 당황했다. 숲의 축복을 내린다고 하여 나무가 얼음의 대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르베븐은
엘프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유레민트를 정령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만 정령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에 가장 철저했다.
그렇다고 거부를 단언할 수도 없었다. 매일 백설의 폭풍과 싸우며 강인해진 르베븐의 눈동자도 이 순간에는 애처롭
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렇게 하세요, 유레민트."
힘겹게 다가온 시즈가 르베븐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라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텐데, 내심 유레민트는 한숨만 쉬
었다.
'시즈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유레민트는 '마땅찮은 이'로서의 시즈를 신뢰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베븐이 일행을 안내한 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조용히 침음성을 발했다. 벽이 검게 칠해진 사각의 방, 모서리에는
커다란 양초가 세워져 불을 밝히고 있었고 안은 온통 후끈거렸다.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일행은 당장이라도 옷을
내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바닥을 덮고 있는 식물들이었다. 분명히 식물들은 옅지만 푸른 빛깔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역시 환경 탓인지 잎이 시들시들했다.
시즈는 탄성을 질렀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성과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잎이 없어. 이래가지고는‥."
"어때요? 유레민트."
유레민트는 이미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식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뿌리가 제대로 박히긴 했는지 걱
정되고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시즈의 목소리가 한 쪽 귀로 들어와 반대편 귀로 빠져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기형아 같은 식물들로 가득했다.
"뿌리를 굳게 박고 일어서요. 세일피어론아드을 지키는 가장 약하고 강한 생명체여‥."
흰 손가락이 잎과 줄기를 살짝살짝 건드릴 때마다 식물들은 연분홍의 빛을 냈다.
"미숙했던 정령들이 성숙해지고 있어요."
"시즈, 네 눈에는 정령이 보여?"
"아니, 추측이죠."
보를레스의 말에 시즈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시즈는 인상이라는 전혀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아리에가 이해되지 않았다.
유레민트의 손길을 받은 식물들은 눈에 띄게 푸른 빛깔을 띄기 시작했다. 큰일을 치렀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비틀거
리며 일어섰다.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엘프들에게도 정신적인 피로를 가져다준다. 보를레스가 굳건히 잡아주
자 베시시 웃는 얼굴이 창백했다.
식물들의 상태는 르베븐에게 아주 이상적인 선물이 되었다. 차를 끓일 때도, 순록의 가죽을 손질할 때도 웃음이 헤
프게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우스웠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아리에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일행을 대할
때는 헤프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리에가 회복될 때까지 유레민트는 몇 차례나 식물들을 찾아가 정
령을 다독였다.
사실 르베븐은 시즈가 아리에보다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몸을 불로 구워
준다고 해도 몸의 체온이 제대로 돌아오기 힘든 상태였던 시즈는 고작 몇 시간만에 멀쩡해진 것이다.
죽어있는 팔조차 생명을 부여했던 게 성약(聖藥), 에릭사의 묘용이었다. 팔이 사라진 지금 시즈의 생명력은 불치병
조차 자체의 저항력으로 이겨낼 정도였다.
"괴물. 넌 인간이 아니야."
보를레스의 농담 반, 진담 반에 시즈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횃불의 붉은 빛을 그대로 받아드린 수
정 같은 눈동자를 보며 누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자신할까. 불안한 심정을 알아차린 듯 식은땀을 흘리던 아리에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자네들, 얼음의 대지에는 무슨 일이지? 몰라도 상관이야 없지만 궁금하군. 설마 여름인 대륙이 싫어서 사
시사철 추운 곳으로 이사를 왔나?"
"유적을 찾아왔습니다. 저희는 학자거든요."
나무의 정령들을 유레민트가 힘을 주듯이 아리에에게 힘을 받은 시즈가 르베븐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르베븐은
미심쩍은 어조로 반문했다.
"저 덩치가 학자란 말인가?"
그의 반문은 보를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자라면 하루종일 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보를레스의 덩치
와 근육은 아무리 불량 학생이라고 해도 만들어질 만한 게 아니었다. 쿡, 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리며 시즈가 대답했
다.
"그는 호위입니다. 저희를 보호해주고 있죠. 얼음의 대륙은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흐음‥. 그렇군. 유적을 탐사하러 왔다라‥."
"혹시 이 아는 유적이라도‥."
"자네, 혹시 대륙에서 얼음의 대지에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나?"
"들어본 일은 없습니다. 단지 어떤 서적에서 찾았을 뿐이죠."
갑자기 르베븐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볼을 긁적이며 르베븐은 이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
었다.
"나도 한 번 들었을 뿐인, 유적의 존재를 자네처럼 젊은이가 알다니 신기하군, 그래. 혹시 대륙에서는 대단한 학자
로 이름을 떨쳤나?"
반은 맞았지만 시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냉큼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은 르베븐이
지도를 가져왔다.
"이건 내가 20년 전에 집에 머물렀던 대륙인에게 맡아두었던 지도야. 그들도 자네들처럼 유적을 찾는 이들이었지.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건 혹시‥."
"그래! 학자라서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그들은 여기에 자신들이 찾는 유적가 어디쯤이라고 예측을 해놓았지. 시즈,
자네의 생각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선구자들의 생각도 한 번 보면 나쁘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대륙에는 얼음의 대지에 대한 지도마저 없는 실정이었다. 아주 고대에 그려져 내려오던 그림 몇 장이 남아있었지만
자원도 없는 대지를 그려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륙의 지도도 완전히 그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르베븐의 말대로라면 시즈보다 먼저 얼음의 대지를 밟았던 자는 엄청난 부자였거나 뛰어난 학자라고 보는 게 옳았
다. 망설이지 않고 지도를 펼친 그의 투명한 동공에 흐릿하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함께 고개를 들이민 유레민트가
중얼거렸다.
"정중앙이군요."
"가능할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를레스와 아리에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리에는 참고 조용히 들었지만 보를레스에게 그 정도
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설명을 좀 해달라고."
"자네는 바보인가?"
"르베븐까지 왜 그러십니까?"
"이 얼음의 대지 한 가운데 인간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르베븐의 질책에 깨달은 사람은 아리에였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아! 하고 외쳤다. 보를레스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물이 없군요. 게다가 동물도 적겠죠. 사람이 살 여건이 되지 않아요."
"병난 아리에 아가씨가 멀쩡한 보를레스보다 낫군."
보를레스가 이를 갈았지만 르베븐은 완벽하게 무시했다. 그에게 시즈가 물었다.
"이 지도를 가지고 있던 학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아마도‥ '미첼‥드나헤'라고 했을 거야."
"미헬 드나에!"
"그래! 미헬 드나에였어! 엘프님께서 아시는 군."
브베븐은 자신이 알아냈다는 듯 기뻐했다. 시즈가 유레민트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를 아십니까?"
"네. 물론이죠.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는 20년 전에 실종된 아스틴네글로
드의 현자에요. 지금은 미헬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종자들에 의해 아스틴네글로드의 일곱 번째 은자라고 불리
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