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7화
유레민트는 잊었던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얼굴이 밝았다. 하지만 잠시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지도는 제 생각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역사의 고리는 대륙의 어떤 단체보다도 뛰어난 마법사와 학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오지에서도 살
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쩌면 오지일수록 그들에게는 정체를 숨긴다는 이유로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로 갈 생각인가?"
"예. 가야지요."
"그럴 거면 그 양털모피는 버리고 가게."
"옷을 버리고 가라니, 누굴 얼어 죽일 말씀이시오?"
발끈하여 보를레스가 소리쳤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쳤다. 양털은 일행에게 얼음의 대지를 헤치고 나갈 하나
뿐인 보루였다. 침착하게 시즈가 이유를 물었다.
"다른 방안이 있습니까? 보를레스의 말대로 양털은 매우 중요한 방한복입니다."
"허허‥. 양털 따위를 믿고 얼음의 대지, 중심을 향해 가겠다고? 그건 미친 짓이야. 이 양털을 내게 주게. 난 자네들
에게 순록과 물개의 가죽을 주지. 양가죽보다 백 배는 나을 걸."
그리고 르베븐은 자신 있어 하는 물개의 가죽을 내놓았다. 한 번 쓱 쓰다듬은 아리에가 경탄했다.
"와아‥. 굉장히 부드러운 데요?"
"하지만 털은 별로 풍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순록도 마찬가지에요."
보를레스의 말에 뒤늦게 꺼내온 순록가죽을 만져본 시즈가 르베븐을 올려다보았다. 르베븐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양털은 꼬불꼬불 엉키지만 순록과 물개는 아니거든. 촘촘한 털이 가득해서 안까지 물이 스며들지 않지. 반대로 양
털은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을 빨아드려서 더욱 춥게 된다고. 사실 제일 좋은 것은 해달의 가죽이지. 그런데 해달은
뭍에 올라오지를 않기 때문에 잡기가 너무 어려워. 그러니 이걸로 만족하게."
"감사합니다. 저희는 전혀 몰랐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환경이란 그 곳에서 적응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턱대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지."
르베븐이 결코 대륙의 학자들에 처질 현자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음성에는 무게가 있었고 경험에서 나온
깊이가 있었다. 손가락을 꼽으며 다시 입을 연 르베븐은 일행이 얼음의 대지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중앙에 가면 혹시나 에스키모들을 만날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극히 주의하게. 여자들은 혹시 그들에게 붙들린다
면 그냥 혀를 깨물고 죽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드문 얼음의 대지에서 에스키모들은 안전한 종족 번식을 위해 타
종족의 씨를 받지. 여자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 몇 번이고 다른 종족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르베븐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식인을 하기도 해. 잔인하고 호전적이지. 고기를 먹는 자들이 호전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얼
음의 대지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은 대부분 기름기가 많지. 에스키모들은 식인으로 에벌레 등에서나 얻을 수 있는 성
분을 얻는 모양이야."
'단백질이군.'
시즈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가 어떻든 식인이라는 결과는 같은 인간으로써 혐오스러웠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지 얼굴을 편 사람은 유레민트에 불과했다. 엘프들은 인간이라는 타종족의 습성도 인정하고, 심지어는 오크들의 종
족습성도 인정하는 이들이다. 에스키모들의 식인이라는 습성 또한, 그들의 문화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유레민트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르베븐이 한 마디 했다.
"어쩌면 엘프님을 보면 다들 좋아서 잔치를 벌릴 지도 모르지요. 엘프의 고기는 용의 피처럼 심신에 좋다고 하니
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방 대륙의 무사들이 세일피어론아드를 공격해왔을 때, 식성이 풍부한 그들은 걸어다니는 돼
지, 오크에 경탄했고, 순수한 육체를 가졌다는 엘프에 반해서 그들을 생으로 잡아먹기도 했다. 소문은 과장되어 엘
프의 고기를 먹으면 불사의 육체를 갖게 된다고까지 나돌았다.
당시의 일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나 할머니에게서 얼마나 끔직했던 과거인지 들었던 유레민트는 금
새 시즈들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려 뜨렸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르베븐은 껄껄대며 말했다.
"보를레스가 있으니 걱정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해골을 머리에 쓴 여자가 이끄는 에스키모를 만나거든 조심하게.
해골을 머리에 쓴 여자는 바로, 콜로마녀야. 매우 위험한 주술사지. 그들은 분홍빛 눈이 내리면 나타난다고들 하더
군. 난 지금까지 본 일이 없지만 말야. 하하하핫!"
시즈 일행은 완전히 침묵했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지만 얼음의 대지는 추위 이외도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너
무나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