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8화
르베븐이 정성껏 손질해준 순록의 가죽을 입은 보를레스는 무척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유레민트와 아리에도 놀라움
을 감추지 못하고 얼음바닥을 뒹굴며 장난을 쳤다. 추위는 더 이상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르베븐은 옷 이외에도 간단하게 세울 수 있는 천막을 제공했다. 일행은 그 안에서 서로를 껴안고 자며 얼음의 대지
중심을 향해 전진했다. 물론 보를레스는 아리에를 안지 못했다. 그 전에 눈발 날리는 시즈의 눈빛에 얼어죽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흠모하는 유레민트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조금씩 눈과 얼음의 땅에 익숙해졌다. 르베븐이 주의시켰던 가죽 손질도 밤이면 가벼운 일과
처럼 이어졌다. 손질을 안 하면 털들이 엉켜 가죽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죽 손질이랑 의외로 시간이 많
이 걸리는 일이었다. 다행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가죽이 남아있어 두 사람이 사냥을 나가면 나머지는 가죽을 손
질했다.
"시즈, 잘 보라고. 오늘은 내가 끝내주는 낚시 솜씨를 보여주지."
"하하핫!"
시즈는 거침없이 웃었다. 얼음의 대지에서 육지는 대부분 섬이었다. 무수히 많은 섬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바닷물이
얼어서 거대한 대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찾으면 얼음 아래로 물고기들이 지나가는 낚시터를 찾을
수 있다. 단, 얼음을 깨는 게 꽤나 어렵다. 보를레스는 희대의 바스터드 소드라고 할 수 있는 제뷔키어를 얼음 깨는
데 사용했다.
팍! 팍! 팍! 팍!
"으야아아아아압!"
용병왕을 상대하던 현란한 검술이 얼음을 향해 쏟아진다. 수북히 쌓인 얼음가루는 당장에 산을 이뤘다. 그리고 그것
을 발로 꾹꾹 밟아서 의자 모양을 만들었다.
낚시대는 그리 길 필요가 없었다. 얼음 아래로 실을 늘어뜨리기만 하면 되니까. 제뷔키어는 곧 낚시대로 변모했다.
얼음의 대지에는 육식성 물고기가 많았다. 어제 잡았던 백곰의 살조각은 꽈악 얼려져있었지만 물에 들어가는 즉시
굳어있는 피를 풀어놓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낚시대를 늘어뜨린 보를레스는 인생의 마지막을 여유롭게 장식할 늙은이의 유희거리를
보는 듯 했다.
시즈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음의 절벽가로 왔다. 절벽에는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그는 오늘의 별미로
새고기를 준비할 심산이었다. 무리가 많은 새들은 조심해서 잡아야 한다. 잘못하면 단체로 덤벼들기도 한다. 얼음의
대지에 서식하는 무리들답게 새들도 매우 난폭했다.
"바람이여‥. 나의 부름이 지금 있으니, 그 뜻을 따라 불어주세요."
손을 뻗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응축되어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오자 바로 준비했던 바람을 폭사시켰다.
퍼득퍼득!
갈매기는 갑자기 자신을 감싼 이상기류에 당황하며 날개를 퍼덕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이상기류는 실처럼 날
개의 깃털까지 하나하나 옭아맸다.
"좋아."
품 안으로 정확하게 떨어진 갈매기의 목뼈를 바로 부러뜨린 시즈는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좋은 답례를 받았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휘날렸다.
"보를레스. 어때요?"
시즈가 돌아올 때까지도 보를레스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성과가 없었는지 지루함과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그 얼굴
을 한 손이 일그러뜨리며 받치고 있었다. 키득거리며 갈매기를 잡고 있는 그가 못 마땅한 보를레스가 벌떡 일어섰
다.
"제길! 웃지 마! 낚시란 안 잡힐 때도 있는 거라고!"
"보를레스!"
"왜!? 내가 잘못 말했어!?"
"그게 아닙니다. 저걸 보세요."
시즈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보를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땅이, 분홍색이잖아?"
"빨리 가봐야겠어요."
그들의 천막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보를레스와 시즈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천막이 가까워지자 그들의 몸에
천천히 눈발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분명히 붉은 색의 눈이었다.
"언제부터 내린 겁니까?"
"모, 모르겠어. 난 계속 낚싯줄만 바라보고 있었단 말이야."
시즈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냉정하게 보이던 수정의 눈동자가 분노의 불길을 태워댔다. 유레민트와 아리에가 있어
야 할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설(赤雪)이 시즈를 주위로 빙글빙글 돌면서 그를 약올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시즈, 진정해.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당장 여자들을 찾아야 해!"
"후우‥."
보를레스가 손을 저으며 시즈를 말렸다. 당황할 때 동료가 있음은 이렇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시즈는 눈을 감고 정
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내 의지를 따라라. 바람이여!"
"크윽!"
강한 의지의 발현로 인한 바람에 보를레스는 뒤로 쓰러질 뻔한 몸을 가눴다. 잠시 후 시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저 쪽입니다."
"가자!"
두 사람의 인영을 눈이 휘감는다 싶더니 사라져버렸다. 그 정도로 보를레스와 시즈는 빠르게 움직였다.
이글거리는 불빛. 에스키모는 대륙인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증거였다. 얼음의 대지에서 불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이
나 다름없으니까.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견하기에도 거대한 얼음집 가운데에 그들을 두고 에스키모의 사내들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술과 음식을 먹
고 있었다. 그들이 왜 기뻐하는지는 르베븐을 통해서 자세히 들었던 두 여인이었기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는 알지 없었다. 다만, 분홍빛 눈과 함께 에스키모들이 몰려왔을 때, 아리에는 검을 들고 유레민트
는 마법을 일으켰다. 하지만 해골을 머리에 쓰고 온몸을 검게 칠한 여인이 이상한 주문을 중얼중얼 외는 순간 머리
에서는 현기증이 일었고, 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주술이라면 시즈와 보를레스 두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길지 걱정이 일었다. 하지만 그보
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에스키모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남자가 오지 않는다는 가정이었다.
영원하길 바랬던 에스키모들의 식사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한 여인이 다가와서 아리에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몸에
붉은 색의 액체를 바르기 시작했다. 유레민트도 마찬가지. 에스키모의 사내들이 욕망에 흥건해진 눈빛으로 바라본
다.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붉은 액체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 순간 근육에 들어있던 힘이 빠져
나가고 팔 다리가 풀렸다.
아리에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으로 있는 힘껏 외쳤다.
"시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