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00)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9화

어디선가 돌풍이 천막을 통째로 쓰러뜨릴 듯 불어댔다.  에스키모들이 평생을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바람이었다. 

당황한 해골의 마녀가 땅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중얼 그들의 신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바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자는 따로 있었다. 

"아리에‥." 

얼음의 대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리에는 온몸을 나긋하게 만드는 따스함을 느꼈다.  긴

장이 풀어져 천천히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의 몸을 옷과 가죽으로 둘둘 말아서  안아든 이는 시즈였다. 얼음처럼 차

갑고 투명한 눈동자, 그는 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얼려버릴 목소리를 냈다. 

"보를레스, 갑시다." 

"그래! 많이 기다렸지요? 유레민트." 

"조금 늦었어요." 

유레민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붙잡은 보를레스의 손끝으로 그녀의 등에 흘러내린 땀이 축축하게 다가왔다. 비

장한 표정으로 보를레스가 물었다. 

"아무 일 없었죠?" 

무슨 일이 있었다면 보를레스는 제뷔키어에 걸고 에스키모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해 버릴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유레민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키모들이 두 눈을 멀뚱히 뜨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보를레스와 시즈는 담담하게 움직였다. 그 때, 에스키

모의 마녀가 앞을 가로막았다. 

보를레스와 시즈가 우뚝 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유레민트는 긴장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두 사내에게 말했다. 

"그녀를 조심하세요. 그녀의 주술은 르베븐의 말처럼 만만한 게 아니에요." 

"분홍색 눈발의 장난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유레민트. 그 정도라면 이미 시즈가 간파하고 있으니까." 

"예?" 

유레민트는 반문했지만 시즈의 입가가 비웃음에 가깝게 말려 올라간 것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해골 마녀는 

눈을 크게 떴다, 작게 떴다 하면서 시즈를 노려보았다. 인간에게서 색이라는 것을 한꺼플 벗겨낸 듯한  시즈의 외모

는 에스키모인들에게도 암적인 두려움을 선사했다. 

숨을 죽이고 은백의 정령의 눈치를 살필 때, 바람에 날린 돌맹이 하나가 정령의 뺨에 살짝 상처를 냈다. 

주루룩하고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에스키모들은 고개를 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피다. 인간이다!" 

"인간이야, 인간!" 

그들의 용기는 해골의 마녀가 양손을 들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극대화됐다. 

"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에스키모 하나를 발로 걷어찬 뒤 보를레스는 시즈의 옆으로  와 섰다. 현재 시즈의 분노가 

극에 치닿고 있음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몇 초 후 에스키모들에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고 있는 그는 불행

한 미래를 예측한 예언자처럼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모두 비켯!" 

콰르르르! 

창은 원래 끝이 날카로워 바람이나 공기를 효과적으로 가를 수 있다. 한 에스키모는 던진 창이 가다가 떨어지는 것

도 아니고, 반대로 되돌아오자 기겁을 했다. 천막은 시즈의 은발이 날리며 생성된 보이지 않는 칼날에  산산조각 났

다. 같은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붕 떠서 뒤로  날아갔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시즈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토막난 생선처럼 잘린 팔 다리가 얼음 위에서 펄떡였다. 보를레스는 은근히 눈썹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열 받았군. 하지만 당신들 잘못이라고.' 

"유레민트, 우리는 먼저 가죠." 

"하, 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에스키모들은 모두 죽어버릴 거에요." 

"어쩔 수 없어요. 시즈를 화나게 했으니. 그가 부리는 바람을 얕보면 안  되요. 바람은 충분히 파괴자가 될 수 있거

든요." 

"보를레스라면 말릴 수 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그렇다면 어서 말려요!" 

유레민트는 에스키모들의 행동을 단지 그들의 습성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

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시즈를 말릴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시즈!" 

"여기서 멀어지십시오. 나는 저들을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돌아온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를 보고 시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말리러 왔다는 것을. 멀리서 그를 본 

유레민트는 금새 기가 질렸다. 시즈가 얼마나 강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지 강한  압력으로 얼음에 죽죽 균열이 가

고 있었다. 

"시즈, 그만둬요. 그들의 문화에요. 어쩔 수 없다고요." 

"어쩔 수 없다면 그 문화를 없애버리겠습니다." 

"이 곳은 그들의 대지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얼음의 대지에 적응한 자들이고요.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은 

얼음의 대지에서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생긴  당연한 문화애요. 우리가 얼음의 대지에 침범한  이상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달라도 이해해야 되요." 

시즈는 이를 갈며 유레민트와 해골의 마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에스키모들은 본능적으로 구

원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머리를 얼음에 마구 박아가며 용서를 비는 그들은 시즈를 신과 다름없는 존재로 착각했다. 

백설의 머리카락, 얼음 같은 눈동자‥ 얼음의 대지를 다스리는 신의 여인을 건들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용서를 비는 

에스키모를 보며 분노했던 시즈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좋아요." 

"휴우‥. 고마워요, 시즈." 

바람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시즈가 돌아서자 유레민트는 안도의 한숨을 흘려보냈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그녀

는 내심 눈물이라도 펑펑 쏟을 지경이었다. 

보를레스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유레민트의 앞인지라 제법 허세를 떨었지만  정말로 맞선다면 목숨을 몇 개나 

감춰뒀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속사정도 모른 채 시즈는 아리에를 꽉 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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