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0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꼭 역사의 고리를 찾아야 해?"
깨어난 아리에가 다짜고짜 내뱉은 물음이었다. 시즈와 보를레스가 제 때 온 덕에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아리에는 반쯤 지쳐있었다. 그녀의 눈은 제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흥건했다.
"미안, 잠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얼음의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즈를 맡았다. 그는 털썩 앉아서 전혀 밤이라고 느껴
지지 않는 백야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왜 굳이 그들을 찾으려고 하는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원한일까? 나를 못 살게 구는 게 귀찮아서? 역사를
뜻대로 바꾸려 하는 그들이 싫어서?'
어느 것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고민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데리고 올까요?"
"그만둬요, 유레민트. 어차피 목표 없는 걸음은 언젠가 방향을 잃게 되니까."
"하지만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어요. 움직이지도 않고 저러고 있다고요. 이 곳에서는 한 시간만 움직임을 멈춰도 차
가운 한기에 온몸은 동상에 걸려버릴 거에요."
"흐음‥."
모포를 덮은 아리에가 몸을 웅크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시즈를 데려올 만
한 사람은 아리에 밖에 없었지만 그녀 또한 시즈와 다를 바 없으니 막막했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얼음의 대지에는 더욱 차갑게 눈이 내렸다. 대륙과는 다르게 펑펑 쏟아지는 눈이 얼마나
쌓였을까.
저벅저벅‥.
보를레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즈에게 다가갔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눈의 퍼석거림이 시간이 꽤나 지났음을 간
접적으로 전해주었다. 그의 기척을 느꼈지만 시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에 눈과 얼음이 내려앉은 모습은
진실로 눈의 정령이 강림한 듯 했다. 보를레스는 얼음 조각같은 청년의 어깨에 쌓인 눈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그만 들어가서 몸을 녹여라. 더 이상은 자해일 뿐이야."
"‥‥."
"바보 같은 놈!"
대답도 없이 멍한 시즈의 얼굴에 보를레스의 거대한 주먹이 작열했다.
뻐억!
뜨거운 마찰음이 시즈를 눈바닥에 데굴데굴 굴렸다. 보를레스는 시즈를 때린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지금 네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내 주먹을 주체할 수가 없다. 대륙을 좌지우지하며 일들을 처리해가던 넌 어디
로 간 거냐? 이 찬 바람에 얼어버린 거냐? 너 자신의 명칭을 잊었나? 마땅찮은 이여!"
"‥보를레스."
멱살을 잡아 올려 한 방을 더 먹여주려 할 때, 시즈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보를레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뭐냐!?"
"당신은 왜 날 따라온 겁니까? 이 목적도 확실하지 않은 길을‥."
"네 녀석이니까 따라왔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도 왜 이 길을 가야할지,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즈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내 잘못이
다.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은‥. 하지만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그냥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좋아. 가거라. 나도 그 뒤를 따르지."
"‥‥."
"가끔은 목적 없이 방황해도 좋아. 너 자신만 생각하면서 길을 간데도. 나는 널 지켜볼 자신이 있다. 몇 번 상처 입
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
"그 이유가 뭡니까?"
암울한 표정의 시즈가 묻자 보를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왜 저 녀석을 위해 이토록 헌신적일까. 언젠가 보를레
스는 시즈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라고 하여, 이토록 마음이 끌릴까? 내심 천천히
떠오른 답에 보를레스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등을 돌리고 겸연쩍은 어조로 대답했다.
"친구‥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친구‥?"
시즈는 자신만 들을 수 있게 반문해보았다.
'친구.'
세일피어론아드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 중에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나. '동료.'라는 이
름으로 함께 했던 이들. 시즈는 친구라는 말에 특이한 감정이 들었다. 허전했던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느낌이었
다.
쑥스러워 등을 돌린 보를레스,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서 따스한 기운이 한 줄기 섞여있음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맞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절벽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들은 자유로운 날개 짓을 하며
말이 없는 내 마음을 아는지 작은 내 모습 위로‥ 날아가네‥.
다가가면 멀어지는 사람들, 사랑하는 그대마저 떠‥난
밤이 오는 노을 아래 서 있는 나는 홀로 이렇게 울고 있네‥.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고 싶지만
나의 곁에 다가와준 내 친구는 힘이 들어도 꿈을 찾고 있었지.
어떤 날은 버려진 나를 위해서‥.
이제 나의 꿈들을 찾아 떠나야겠어.
그 누구나 새로운 많은 날이 있잖아.
나의 꿈을 찾아서 다시 노래할 거야.
언제까지 변하지 않는 나의 친구와‥.
노래가‥ 끝나가는 내 곁에‥ 나를 보는 친구가‥ 있‥네‥.
<블루 - 친구를 위해>
가슴이 따뜻해졌다. 보를레스는 등을 돌렸다. 시즈는 그 옛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매혹적은 미소를 은은하게 짓고
있었다.
"‥‥."
멀리서 둘을 엿보던 아리에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보를레스보다도 믿어주지
못했다. 흐느끼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며 유레민트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리에. 그들은 이제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친구에요. 당신은 앞으로 시즈와 함께 해야할 연인이
고‥. 믿음이란 어떻게 믿어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앞으로 어떻게 믿어주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죠."
소리 죽여 울며 아리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