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3화
불빛에 붉게 달아오른 얼음 계단은 일행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정을 박은 신발을 신고 있다고 해도 엉거
주춤할 수밖에 없는 시즈들의 자세에 미헬은 웃음을 참아가며 벽에 만들어져 있는 불길에 불씨를 넣었다. 얼어있던
기름이 녹으며 금새 통로는 밝아졌다.
"조심하시오."
"말하지 않아도 그러고 있소."
보를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이름까지 드높은 검사가 되었지만 외치는 기세와는 달리 그의 다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계단은 무척 길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태라서 얼마나 내려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3, 4층 깊이는 되어 보였다.
"얼음 속에 있는 지하의 도시라‥."
유레민트는 아스틴네글로드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프르즈의 지하 연구 설비에 놀랐다. 그녀도 처음 보는 신기한 기
구들과 기계들이 주위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그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는 듯 연구실은 천정에 달린 광석들을
빛냈다.
"윽!"
눈을 뜨자 주위를 둘러본 보를레스는 얼굴을 꼬집어보았다. 상당히 아팠다. 꿈은 아니라는 뜻인데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 삭막한 기계와 약품으로 가득했던 연구실은 어느 새 초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잎새는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이것도 마법이오?"
"그렇소. 비슷한 마법이오. 인간이라는 것은 눈으로 인식을 하게 되면 느낌조차도 바꾸게 되지요. 그만큼 눈에서 뇌
로 전달되는 영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암시라고 할 수 있소. 실재와는 다른 영상이라고 해도 인간은 진실이라고 인
식하게 되면 몸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오."
미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몸이 뒤로 날릴 것 같은, 돌풍이었다.
"으아아앗!"
시즈 일행은 붕 떠올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깨진 듯이 아팠다. 아리에는 눈물이 반쯤 흘러
나온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이것도 환상인 거야?"
"그렇소.
미헬은 어느 새인가 하늘에서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고대 이전의 세일피어론아드를 알고 있소. 사실 역사의 고리는 당시의 문명을 조사하던 고대 마법사의
모임이오. 역사에 따르면 멀고먼 공간을 넘어서 세일피어론아드로 이주해온 이들은 수많은 빛들의 조작으로 진실인
지 허위인지 알 수 없는 영상에 현혹되고 누구나 파멸의 불꽃을 사용하는 위대한 문명을 가지고 끝내 멸망하고 말
았소. 아무리 발전을 한다고 해도 멸망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게 역사를 잡고 있었던 이유입니까?"
"그렇소. 고대의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은 오랜 연구 끝에 인간의 문명에서 가장 안정된 시점으로 지금의 것을 집었
소.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과학기술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마법이 있소. 마법이라면 이상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
잠깐 맘을 멈춘 미헬은 힐끔 시즈를 내려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대자가 나타났소. 그들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역사의 조정이 자유의 억압이라고 생각했고 자연 자체를
움직이는 강대한 힘으로 역사의 조정을 거부했지. 그들은 모두 특이한 자연의 친화력과 뛰어난 의지를 가지고 있었
는데 자신들이 사라진 후에는 역사의 고리에 대항할 존재들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고, 한 가지 생각을 짜냈소.
'우리와 같은 힘을 가진 이들을 음유술사라는 이름 하에 묶자. 그들의 사명을 역사의 자유 해방이라고 정의하자.'
모두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소. 어떻게 보면 노래가 자연에 가장 친화적인 접속 수단이라고도 하
기 때문이더군. 어쨌든 음유술사라고 자신들을 정의한 이들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찾아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지.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오."
역사의 고리의 수장에 의하여 그들의 호적수였던 '음유술사'의 탄생 비화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야기에 빠져든
일행,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시즈는 미헬을 다그쳤다.
"단, 한 사람? 그게 누구입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소. 그는 후예를 만들지 못했소. 세상이 넓다지만 그들처럼 뛰어난 의지와 자연친화력을 가진
이가 우글거리지는 않소. 때문에 음유술사 중에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극히 적은 것이오. 사실 지금도 세일피어론아
드에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음유술사가 몇이 있을지 알 수 없소. 물론 바람의 음유술사
중에서 그대보다 강한 자가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헬의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한 뉘앙스를 남겨두었기에 시즈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미헬은 그가 묻기를 기다
렸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 책‥. 기억하시오?"
"그것은‥."
"또다른 고향이로군요!"
시즈보다 먼저 대답한 사람은 유레민트였다. 기이하게 흥분한 그녀를 보고 시즈와 미헬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아랑곳없이 유레민트는 주먹마저 불끈 쥐고 소리쳤다.
"일기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소설이에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기계들과 세상, 진정한 환상의 세계가 담
겨있는‥."
"하하하하‥."
시즈는 유레민트가 그토록 '또 다른 고향'에 취한 추종자였는지 몰랐다. 열성적으로 설명을 하던 그녀는 이내 주위
의 시선을 알고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낄낄 웃으며 보를레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
다.
미헬도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의 무표정한 인형 같던 유레민트에게 이런 모습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군요. 재미있네요."
"헤에‥."
아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유레민트는 은근히 어벙한 행동을 자주 저질렀다. 다른 곳에서
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행동한다는 뜻이었는데 한 번 보고 싶었다.
"자자! 유레민트,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리지요."
잠시 흩어졌던 주의를 모으기 위해 미헬이 박수를 쳤다.
"이 '또 다른 고향'에서 당신처럼 뛰어난 현자마저 경탄시켰던 기계 문명은 '마땅찮은 이'가 창조한 게 아닙니다.
훨씬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지요."
"에?"
"바로‥ 고대 이전의 지고(至古)시대에 말입니다."
"‥‥."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기이한 기류가 그들 사이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때, 유레민트가 조용
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시즈 세이서스는 아마도‥ 지고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