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4화
"정말이야? 시즈."
보를레스가 당장에 시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묵묵하게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고향'은 시즈의 일기로군요."
유레민트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있는 세계였다니, 그리고 그 곳에서 살던 인간이었다니‥. 미헬은 '
또 다른 고향'을 쓱 훑어보고 충격에 빠져있는 그들을 깨웠다.
"시즈, 그대가 우리의 생각대로 수많은 시간을 넘어서 왔다면‥.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에는 세일피어론아드 사
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의지가 담겨있을 거요. 바람을 부르면 바람이 불고 파도를 부르면 파도가 이는‥."
무슨 말인지 알만 했다. 일찍이 시즈도 알고 있었던 내용이니까. 말이라는 것은 시간과 사용하는 사람에 구애받는
의지의 전달 수단이다. 시즈의 말에는 그가 넘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의미였다. 즉 그가 '아무개야. 안
녕?'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곧 수 천년 간 '아무개야. 안녕?'이라고 울려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소. 물론 예상보다 너무 빠르기는 했지만요. 만약 시
즈, 그대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방법도 알려줄 수 있소."
"돌아갈 수 있는 방법?"
"그렇소.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오. 개인으로서 세일피어론아드를 대변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네 사람이 모두 모인
다면 말이오. 네 사람의 음유술사가 모여서‥."
"그만! 그만해요!"
그 때, 아리에가 소리를 지르며 미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시즈에게 말했다.
"시즈, 혹시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아리에‥."
시즈는 손을 뻗어서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리에는 어깨를 움츠리고 뒷걸음질쳤다.
'이 곳에 그토록 오고 했던 이유가 바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시즈는 어쩔 줄 몰랐다. 유레민트가 다가가서 아리에
를 안고 달랬다. 머리를 쓰다듬고 무슨 내용을 속삭이는 유레민트에게 내심 감사를 전하며 시즈는 미헬에게 얼굴을
돌렸다.
"계속 해보십시오."
"흐음‥. 음유술사들이 모여서 그들의 의지로 그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를 원한다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요."
"으음‥. 이상하군요.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이 어떻게 음유시인의 비사마저 알고 있는 겁니까?"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시즈는 의심난 내용을 물었다. 미헬은 대답하지 않고 초원의 빛을 조작해서
다시 연구실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앞으로 가서 마력을 주입한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씨를
써나갔다. 그러자 얼음의 벽은 또다시 울긋불긋하게 변화하더니 이상한 글씨를 잔뜩 수놓았다.
"주술 방식으로 된 입력기요. 빛의 마력으로 문자를 만들 수 있음을 이용했지. 이 것만 해도 천년 이전에 만들어진
거요. 두 세 번 정도 다시 입력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우리에게는 3개의 입력기가 있소. 번갈아 가며 사용하면 어떤
사실도 소실하지 않지."
시즈는 어쩌면 이들이 얼음 속에 은거지를 만든 이유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을 이용할 수 있는 최적
의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내가 묻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걱정 마시오. 숨기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음유술사의 일을 잘 아는 이유는 간단하오. 사실 음유술사는 네 명이 아
니라는 거요. 다섯 명이오.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빛의 음유술사,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라오. 그의 후손은 역사의
고리와 뜻을 같이 했지요. 사실 역사의 고리에서 이토록 빛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에게 있지만.
사실 땅과 바람, 물과 빛 등은 오래 전부터 역사의 고리가 연구해온 것들이었소. 그래서 불이라는 또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냈소."
"실패했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우리가 실수한 게 있다면 너무나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거요. 불꽃의 춤을 추는 이는 너무나도 불꽃
을 닮았지. 정말로 불꽃의 삶을 살았고, 계속 그렇게 전승해갔소.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오."
그렇게 말하며 미헬은 감상에 찼다. 그는 아주 오래 전 불꽃의 춤을 추는 이를 본 일이 있었다. 그 화려함에 넋이
나가서 눈을 뗄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시즈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 같기도 하고 누구보다 현인 같은 넬피엘에게 해줄 이야기가 생긴
듯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왜 역사의 고리가 둘로 갈라진 겁니까?"
"음유술사들이 밖에서 싸우기 이전부터 역사의 고리 구성원들은 수많은 토론을 했소. 어떤 때는 며칠 밤, 며칠 낮을
하기도 했소. 어느 정도로 역사의 흐름을 규제하는 게 좋을 것인가? 성스러운 회귀 같은 일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
가? 라는 등의 토론이었소. 그런 조취는 당시에 고리를 휘어잡고 있던 세력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소. 그리고 지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나친 간섭은 배제하고 싶소. 이제까지 수많은 제재 속에서도 발전해 가는 것은 좀더 잘 살
고 싶다는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에서 흘러왔소. 우리는 멸망으로 향할 때가 아니라면 이런 자연적인 흐름은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소. 벌써 20년 전의 일이요."
"그렇다면 지금 대륙에 있는 이들은 대체‥."
"말했지 않소!? 토론을 해왔다고. 우리가 여기에 남아있다면 그들이야 당연히 찬성파가 아니겠소?"
"찬성이라고요?"
"그렇소. 바로 성스러운 회귀라는 규제 방법의 찬성자들이오. 그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바로 보이지 않는 혁명이
라고 알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부탁할 게 있소.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말씀하십시오."
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있을 때는 얍삽하게 보이던 인상도 천천히 현자의 풍모가 느껴졌다. 사람의 시선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이다. 갑자기 정중해진 시즈의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헬은 말했다.
"그들이 나갈 때 가지고 한 가지 약품을 가지고 나갔소. 바로 '몽충(夢蟲)'이라는 거요. 과거에 썼던 로치큐라는 곤
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험한 물건이오. 바로 꿈을 뜯어먹기 벌레, 그것이오. 게다가 끔찍한 속도로 번식을 하기
때문에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 막을 수 없소."
"몽충‥? 그렇다면 회귀가 끝난 후에 어찌하려고‥."
"후후‥. 그건 최후의 물품이오. 인간이 문명의 무게에 짓눌려 멸명하려 할 때, 사용하려는 거요. 꿈을 꾸는 이가 없
다면 몽충은 사라질 테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왜 역사의 고리에서는 가만히 있는 겁니까?"
"말했지 않소? 우리는 필요 이상의 간섭은 배제하기로 했소."
"그게 필요 이상의 간섭이란 말이오?"
보를레스가 소리를 높였지만 미헬은 귀가 막혔는지 웃기만 했다.
"프르즈 밖의 일은 우리가 간섭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게다가 밖으로 나가기도 꽤나 귀찮고 말이오. 이럴 때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음유술사를 부려먹어야 하지 않겠소?"
시즈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능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웃고 있었다. 얼음 속에 생으로 호석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치밀어 올랐지만 시즈와 보를레스는 부르르 몸을 떠는 것 만으로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