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00)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5화

"그럼 부탁하겠소. 몽충을 가져간 사람은 유레민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오. 그 자 역시  아스틴네글로드의 은자 

중 한 사람이니까. 내가 일곱 번째 은자라면 그는 6번째 은자요. 검은 로브의 학자를 아시오?" 

"검은 로브라면‥ 한 사람 밖에 없지요." 

신사들은 검은 색을 즐겨 입지만 연회 때 정도의 일이었다.  보통 학자들은 밝은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다. 어두운 

색은 사람을 정돈되게 보이지만 작게 만들고 밝은 색은 활발하고 크게 보이게  만든다. 학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발

표함에 있어서 의상의 색상은 분명하게 존재감을 표현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또 자신이 중요시하는 사상을 뜻하기

도 했다. 

유레민트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라스 도르지아. 다른 이들은 어두우면 움츠려져 보인다지만 그는 아니에요.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좌중을 압도하

죠. 하지만 학식은 대단해요." 

당연할 것이다. 역사의 고리에서 둘로 나눠진 한 파벌의 우두머리이니 말이다. 실베니아에서의 일을 끝으로  그들과

의 싸움이 막을 내리는가 싶었더니 이런 복병이 남았을 줄은 몰랐다. 한숨을  내쉬며 시즈는 보를레스를 보고 미소

를 지었다. 

"아무래도 한 건이 남은 모양이군요." 

미소가 처량하게 느껴져 보를레스는 그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겼다. 어느 정도 아리에는 진정이 됐는지 허리에 양손

을 얹고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그럼 어서 가죠. 시즈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 보내줘야 하지 않겠어요?" 

'화났군.' 

'화났어.' 

'화나버렸네.' 

생각은 비슷했지만 사내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다. 미헬은  흥미로움을 입가에 잔뜩 떠올리고 있었고, 보를레스는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시즈는 눈동자에서부터 미안함을 무럭무럭 흘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가지 않을 건데‥." 

"가지 않다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별로‥." 

돌아가고 싶었다면 예전부터 갈 방법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겠지. 내가 이상한  걸까? 하고 생각하는 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에는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정말이야?" 

마치 고양이가 상대를 탐색하는 듯한 눈치여서 시즈는 그녀를 폭삭 끌어안고 안심시켰다. 

"안 갈 겁니다." 

"정말이지‥." 

"또 울렸다‥." 

보를레스는 큰손으로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는 당황해서 물러섰지만  아리에는 허리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얼굴을 시즈의 어깨에 묻은 채 고개를 흔드는 걸 보니 콧물까지 묻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하‥. 좋을 때로군요." 

"미헬 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보를레스, 미헬님은 50세가 넘었어요." 

"뭐, 뭐라고요!? 전에는 30세가 넘었을 뿐이라고‥." 

유레민트의 말에 보를레스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미헬은  어디를 봐도 30대 중반으로 보일 뿐이었다. 피식하고 

웃으며 무적의 동안은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오." 

"당신, 정말이지‥ 뻔뻔하군." 

"하하하핫! 칭찬으로 듣겠소." 

"시즈! 어서 떠나자. 여기에 더 있다가는 울화통으로 죽어버릴 거야." 

"저런‥. 광풍의 검사가 죽다니‥. 보를레스 씨가 죽는다면 당장에 얼음 속에 생생하게 보관해서 관광객에게 사업을 

펼쳐도 되겠군요." 

턱을 쓰다듬는 미헬은 진지했다. 아래 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능구렁이가 이제는 몸을 휘감고 있다고 생각한 보를레

스는 뒷걸음질을 치며 시즈를 재촉했다. 준비를 하고 떠나려 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고리 마법사들은 갖가지 선물을 

하기도 했다. 

미헬의 말에 따르면 로치큐 사건은 역사의 고리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일이었는데 당시의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목숨을 희생하여 막았기 때문에 바람의 음유술사는 좋게들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 땅의 고동을 밟는 이가 왔다면 

당장에 죽여버렸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있소. 아주 중요한 사항이오. 그라스를 상대할 때 조심하라는 거요." 

"그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게 아니오. 그는 음유술사들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오. 최강이라고 알려진 넬피엘 이상으로 말이오." 

"음유술사들 중에서‥?" 

시즈는 미헬의 말에서 컬컬하게 걸리는 부분을 반문으로 걸러냈다. 음산한 기운이 미헬의 말 한 마디에 걸려있었다. 

그의 질문에 그제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일행도 미헬을 응시했다. 

"아까 말했잖소. 음유술사는 네 명이 아니라고 말이오. 한 명이 더  남아있소. 그라스는 그대들을 제외한 유일한 음

유술사,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오. 그대들이 그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 연구실에서 당황했던 정도가 아니라  환상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시오." 

휘잉― 

미헬의 말이 끝나자 프르즈는 오색찬란한 빛을 거두고 예의 평범한 얼음의 도시로 돌아갔다. 얼음을 한 번 쓸고 다

가오는 바람은 차가웠고 사람이 사라진 거리는 삭막했다. 잠시 주위를 훑어본 시즈 일행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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