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00)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1화

뚜벅뚜벅‥. 

긴 복도를 걷고 있는 사내의 검은 로브가 바닥에 끌렸다. 이글거리는 불꽃에 의해 처진 그림자에게 더욱 어두운 카

리스마를 선사 받은 사내는 방문 앞에 서더니  노크도 없이 철컥 문을 열었다. 방의 주인인가  싶었지만 이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밖은 어때?" 

30대 중반의 초췌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방금 들어온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 물었다. 듣는 것만으로 몸이 눌

리는 기분을 주는 목소리로 사내가 대답했다. 

"실베니아의 발표로 인해 들떠 있다. 역사의 고리를 찾기 위해서 국가들이 암중에 협력하고 있어.  일종의 위기라고 

할 수 있지. 그래봤자 우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빌어먹을 음유술사들이 움직인다면 알 수 없지." 

"그들은 다들 휴식에 들어간 듯 싶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야." 

"누구인데 그러나?" 

"마땅찮은 친구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골치가 아플 것 같았는데‥." 

"자네의 나쁜 예감은 언제나 딱 맞아떨어지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남자가 웃어댔다. 

"별로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로군. 바스티너와 로진스는 어때?" 

"말도 말게. 에레나는 바스티너의 투구가 잘라지면서 빛을 보고 말았어. 마법사들의 말로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

을 받았을 거라더군. 마법사들이 기억을 없애서 먼 시골로 보내놨네. 그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로진스는 여전

히 광적이야. 음유술사 일행과 함께 있던 마녀에게 어이없게 패했던 게 마음에 남았던지 마법연구에 미쳐있네." 

"가장 팔팔한 사람은 에즈민인가?" 

"그 남매 자체가 난리지. 노르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고 투정부리고 있어." 

"무슨 투정!?" 

"밥투정을 부리더군." 

"여전히 특이하군. 그나저나 자네는 어떤가? 츠바틴. 자네가 실패하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어." 

츠바틴은 대답하기에 앞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답답한 얘기를 했더니 마음 속도 답답해졌다.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오자 상쾌했다. 

"나라고 해서 꼭 승리하는 전략을 짜내는 것만은 아니네. 피브드닌인가하는 친구한테 한 방 먹었어. 아스틴네글로드

의 이름이 괜히 높은 게 아니야." 

"상대에 대한 감탄은 그만하지. 우리는 지금 곤란해. 꼬리는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나라별로 역사의 고리에 대해 촉

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거야. 우리가 뜻을 펼치기 힘들어졌어.  얼음 속에서 머리마저 얼어붙은 늙은이들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어. 이제 방법은 하나 뿐이야." 

"몽충인가!? 남은 수단은‥. 다른 이들이 반대할 거야. 노리스를 비롯하여, 노르벨 남매도 말야‥." 

"흥! 그런 뇌까지 근육으로 된 사람들까지 신경 쓸 거 없어. 그들은 우리의  숭고한 뜻을 알지 못하네. 날 알아주는 

이는 오직 츠바틴 그대 뿐이야." 

말을 끝낸 사내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듯 했다. 그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

서 유일한 빛이라고나 할까‥.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츠바틴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라스‥. 난‥." 

"그렇게 어려워할 거 없어. 난 자네를 믿으니까. 그럼 쉬도록 하게. 다음에 다시 들리도록 하지." 

"차도 대접하지 못했는데‥." 

"됐네, 이 사람아. 그럼 가보겠어." 

찰칵. 아스틴 제일의 인테리어 전문가, 랑드라 보이제가 만든 고급 문이 깔끔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 밖으로 들

려오던 기척이 사라져갔다. 미간을 손가락을 꾹꾹  누르고 한숨을 쉰 츠바틴은 방구석에 정리된  커튼 뭉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노리스." 

"당연한 게 아닌가. 막아야지. 우리는 결코 멸망을 위해 싸워오지 않았어." 

커튼 뒤에서 건장한 장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리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간단하게 말하지 말게. 그라스는 보통 남자가 아니야." 

"그래도 마찬가지야.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내가 싸우는 이유는 멸망을 위해서가 아니야. 역사의 고리를 도

운 이유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지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바로 

살아가기 위해서야." 

거대한 바위처럼 노리스의 의지는 굳건했다. 츠바틴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괜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가 

존경하고 아끼는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군.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보네. 바보 같군." 

"누가 자네를 바보라고 했나? 가장 현명한 내 친구여‥." 

노리스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츠바틴은 힘을 줘서 손을 잡았다. 그 악수는 노리스의 의지에 뒤지지 

않을만큼 굳건했다. 

"시즈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녀석이라면 그라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야." 

"재미없군. 츠바틴도 재미없는 친구가 됐어." 

불만섞인 말을 나직하게 내뱉으며 그라스는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어두컴컴한 곳이  좋았다. '빛나는 무

대의 주인'이라는 정반대의 별명을 가진 주제에  말이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철문을 거칠게  열고 닫은 그는 감옥 

같은 방 한가운데 놓여진 의자에 털썩 하고 몸을 묻었다. 

"왜요? 츠바틴이 반대하던가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방안, 목소리는 달콤하게 그라스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휴

식을 거슬리지 않기 위한 그녀의 배려임을 알고 있는 그리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반대는 하지 않더군. 하지만 꺼림직한 표정이었어. 아무래도 날 따라주는 것은 에즈민 뿐인가?" 

"호호‥. 저 뿐이라서 싫으신가요?" 

"글세‥ 멸망으로 향하는 길에 동반자는 적으나 많으나 상관없지." 

"그렇군요. 후후훗." 

어느 새 그라스의 무릎 위에는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라스가 팔을 뻗어서 부르자 단숨에 나타난 것이다. 무서운 

빠르기에 그라스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암살가로서의 재능은 노르벨보다 더 하다더니‥." 

"어떻게 오라버니를 이기겠어요." 

그라스의 손이 소녀의 미묘한 부위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그녀를 몸을 조금씩 꼬아서 피했다.  하지만 반항은 더욱 

요염하게만 보였다. 달아오른 그라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짐승처럼 에즈민을 만져댔다. 작은 신음소리와 거친  숨

소리가 방안을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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