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00)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2화

"제길!" 

노르벨은 벽에 뚫어놓았던 구멍에서 눈을 뗐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

앉은 그는 견딜 수 없다는 주독에 걸린 주정뱅이처럼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에즈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달아오른 신음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에즈민은 노르벨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오히려 그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틀어졌던 걸까‥?' 

플로먼의 저택에 들어섰을 때라고 노르벨은 확신했다. 

굶주림에 지쳐서 세상에서 쫓기듯 도망친 암살자의 세상,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고 알려진 일족은 노르벨에게 

천부적인 재능을 찾아냈다.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여동생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간 그

는 미친 듯이 수련에 열중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누구라도 해도 죽일 수 있는 암살자가 되었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동생의 방. 창문 밖에서 들여다본  그 곳에는 작은 소녀가 한 남자의 배  아래 깔려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분노에 일그러진 눈동자가 불을 뿜을 때, 고통어린 여동생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오빠, 날 구해줘. 난 싫어. 아파. 구해줘.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시선을 통해서 들려왔다. 손톱이 살로 파고들고 입가를 따라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노르

벨은 나설 수 없었다. 에즈민을 올라타고 있는 이는 바로 플로먼의 가주였기 때문이다. 노르벨이 강하다지만 가주는 

전설적인 강자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게 잘못이었어. 당장 뛰어들었어야 했어.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할 지라도‥." 

더욱 수련으로 몸을 혹사시킨 노르벨이 가주를 죽일 자신을 갖고 돌아온 것은 일 년이 지난날이었다. 일 년 전처럼 

동생의 방을 찾아갔다. 더욱 아름답게 변해있는 에즈민‥ 하지만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는 인형이 되어있었다. 

― 당장 구해주마. 에즈민‥.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알았다. 가주의 목에는 단도가 깊숙이 박혀있음을. 쾌락에 빠졌다지만 살기를 느낄 

사이도 없이 에즈민이 번개같은 손속을 날린 것이다. 노르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가 상상보다 훨씬 끔찍했을 에

즈민의 시간들을‥. 그게 한 번의 칼질에 담겨있었다. 

멍하니 서있는 그를 향해 에즈민은 매혹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 오라버니도 절 안고 싶어서 오셨나요? 

피 묻은 알몸으로 안기는 여동생을 노르벨은 넋이 나가서 끌어안았다. 

"다시는 널 혼자 있게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했지만 에즈민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몸이 살아

갈 수 있는 무기임을 알게 된 에즈민의 삶을 더 이상 막을 권리가  노르벨에게는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괴

로워할 뿐‥. 

"그래‥. 에즈민,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해주마. 그게 만약 이 세상의 파멸이라고 할 지라도‥. 넌 내가 싸우는 이유

니까‥." 

흐느낌과 숨소리‥. 어느 것이 자기 것일지 분간할 수 없어진 노르벨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앉아있던 공간에서 빠

져나갔다. 

"‥‥." 

"에즈민‥?" 

"미안해요, 그리스. 기분이 영 아니네요." 

"무슨 일이지?" 

그리스의 물음에 에즈민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노르벨이 숨어있던 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그리스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기분을 안 좋게 했나?" 

"미안. 다음에 계속해요." 

서둘러 옷을 걸친 에즈민은 그리스를 달래기 위해 요염한 표정으로 윙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벗어

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웃기지마. 날 위하는 척 하는 세상 따윈 필요없어. 다 없애 버릴 거야." 

신경질적으로 걸어가던 에즈민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다. 쉬익하는 바람 소리만 남아서 사람이 잠시 전 존재했음

을 알려주었다. 

"로진스. 아직도 패배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그리스‥. 무슨 일이지? 난 바쁘다." 

새로운 주문의 수식을 배열하느라 정신 없는 마법사는 발걸음만으로 상대를 알아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저

으며 자리를 비켜달라는 표현을 하는 그를 검은 로브의 그리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보게. 그렇게 내쫓을 것까지는 없잖아." 

"특별히 할 말이라도 있나?" 

"몽충을 쓰려고 하네. 협력해주겠지?" 

당장 로진스의 얼굴은 굳어졌다.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시선이 빙글 돌며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몽충을 쓰다니?" 

"어쩔 수 없어. 자네들도 패배하고‥. 각국의 첩보기관은 암중에 우리를 압박하고 있네." 

"자, 잠깐! 난 패배하지 않았어. 마녀의 지팡이에 얻어먹은 것은 마법사의 육체를 가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날 보호하는 기사도 없었어. 그리스‥ 자네 혹시‥ 에즈민의 암시에 걸렸나?" 

"날 뭘로 보고하는 말이야? 자네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계획대로  진행할 거야. 그럼 멸망의 날이나 기다리

라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그리스는 벌컥 화를 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래, 날 믿어주는 사람은 에즈민 

밖에 없어. 아까는 무슨 일인지 기분이 안좋았지만 얼마 후면 다시 아름다운 육체를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스

는 힘이 솟았다. 문을 닫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로진스는 한탄했다. 

"바보 같은‥. 자네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계집아이는 100년을 묵은 마녀보다도 위험하다고‥. 이럴 때가 아

니지. 츠바틴을 만나러 가야겠어." 

마법 연구 따위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세상이 남아있어야 진리도 있는 법이다. 주문을 다급하게 외우고 사라

지며 그는 말했다. 

"마법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말겠어. 난 천재라고.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로진스의 저택과 츠바틴의 저택에는 서로 마법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유령처럼 스륵하고 나타난 그를 향해 노리

스가 빈정거렸다. 

"연구에 빠져있다던 사람이 무슨 일이지?" 

"너와 장난할 시간이 없다. 츠바틴 보고 나오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방문을 열고 츠바틴이 들어왔다. 방주인이 왜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건지 의아한 로진스가 물었다. 

"기다렸다면서 왜 밖에 있었던 거야?"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어. 마법 통로가 있다는 사실도 말야‥." 

"꽤나 다급해 보이는데?" 

"그 쪽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한 츠바틴과  마법에 빠진 미치광이, 로진스가 다급해할 만한 조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스를 막아야 해." 

"하지만 무슨 수로?" 

그들은 상대에게 무슨 수가 있기를 바랬던 모양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내는 고개를 젖히며 동시에 중얼거렸

다. 

"모르겠어." 

"우선은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게 연락을 취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노리스의 말에 로진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뭔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로진스는 언성을 높여서 소리쳤

다. 

"이제까지 싸우던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자네들은 자존심이 있는 건가?" 

"자존심 따지다가 꿈꾸는 생물은 모두 사라질 텐데‥? 몽충이 살포되었을 때 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바람을 노래

하는 이 밖에 없어." 

"‥내가 연락하지." 

둘의 대화가 어린애 말싸움 같아서 노리스는 키득하고 웃었다. 그걸 놓칠 세라 츠바틴이 말했다. 

"지금 웃을 때야?" 

"웃지 못할 것도 없네. 자네들이 협력하는 모습에서 희망이 보여서  웃은 것뿐이니까. 그나저나 '번식자'는 누가 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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