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00)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3화

파릇파릇하게 자라다 못해 아주 풍성해진 나무들. 열매마저 탐스러운 그것들을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입맛을 다셨다. 

"이야‥. 잠깐 얼음의 대지에 가있는 동안 대륙은 확연히 달라졌군." 

"그러게. 이렇게 덥다니 탈진해 버리겠어." 

맞장구친 아리에는 얼굴을 찡그리고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계속 닦았다. 얼음 속에  있다가 와서 인지 더욱 뜨

겁게 느껴지는 날씨에 그녀는 조숙함이고 뭐고 몽땅 내던졌다. 옷자락을  펄럭여 바람을 집어넣자 은근하게 내보이

는 속살에 시즈는 얼굴이 보를레스가 탐내는 열매들처럼 붉어졌다. 

"아리에, 시즈가 곤란해 하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너무 더운 걸‥. 유레민트는 덥지 않나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죠?" 

"덥긴 하네요." 

태연하다는 것은 행동을 가리키는 것뿐이었다. 아리에는 유레민트를 놀리고 있었다. 긴 금발을 틀어 올린  유레민트

도 땀을 뻘뻘 흘렸던 것이다. 숲의 종족이라는 그녀마저 이토록 더위를 타다니 심각했다. 

평상시라면 시즈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시즈의 바람에 익숙해지면 더운 날씨나 추운 날

씨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다. 시즈는 왠만해서는 바람을 불게 하지 않았다. 

"시즈는 안 더운 모양이야." 

얼굴이 붉어졌지만 시즈는 웬만해서 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의 백은빛  머리카락은 햇빛을 대부분 반사해버리기 때

문에 검은머리의 아리에보다는 더위를 덜 탔다. 바람이 그를 좋아해서인지  은은하게 주위를 감돌며 더운 공기로부

터 보호했다. 덕분에 곁에 있는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그가 반사하는 햇빛으로 더욱 더워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마을이 보이는 군요. 시원하게 맥주라도 마시고 가죠." 

얼음의 대지를 떠나온 지 십여 일, 시즈들은 아스틴의 영토를 밟았다. 높게 솟은 럴크 산맥의 등줄기를 따라가며 마

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기에 멀리 보이는 연기는 오랜만에 휴식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여행을 하시는가 보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뭘 드시겠습니까? 미리 추천을 해드리자면 여

기는 버섯의 명산으로 꼽히는 지역인 만큼 버섯 구이와 수프가 아주 일품입니다.  구이는 토끼 고기에 버무려서 향

긋함과 알싸함을 느낄 수 있고 수프도 역시 달콤함과 향긋함을 함께 느낄 수 있죠."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친절한 미소와 민첩한 안내 후, 바로 주문을 받기 시작하는  주인장은 척 보기에도 상당한 베

테랑이었다. 이런 산골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외부인에게서 이득을 얻는 게 실제적인 수입임을 잘 알고 있

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눈을 가늘게 째려보는 손님들은 변모된 주인장의 모습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극성스러운 친절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앉은 시즈 일행. 배고픔에 정신 없는 보를레스만 신난 어조

로 주인의 말을 받아쳤다. 

"이거 제대로 걸렸군. 오랜만에 배 좀 호강을 시키겠어. 주인장이 추천하셨는데 안  먹어볼 수 있나! 믿고 주문하지

요." 

"하하‥. 탁월하신 선택이군요. 그렇다면 술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이왕 추천하신 김에 주인장이 마지막까지 장식을 해주시구려." 

"그러시다면 남자 분들께는 칼칼한 맛이 뛰어난 칼시아를 드리죠. 칼시아 잎을 짜서 나온 액을 숙성시켜 만든 것으

로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린 맛은 맥주보다도 입과 목을 시원하게 축여줍니다. 그리고 숙녀 분들께는‥." 

"저희도 칼시아로 주세요.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시원한 게 마시고 싶네요." 

아리에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왜요? 여자는 마시면 안 되는 술인가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좀 독합니다." 

"괜찮아요. 오늘은 이 마을에서 자고 갈 생각이니까. 그렇지? 시즈." 

아까부터 눈길을 끌었던 은발의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할 때는 얼음처럼 차갑게 보이던 그가 미소

를 짓자 얼음이 단숨에 녹아 내렸다. 주인은 남자였지만 은은하게 감도는 청년의 미소에 매료되었다. 왠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주무신다면 음식은 조금 싸게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관도 합니까?" 

"물론이죠. 방이 작기는 하지만 며칠 지내기에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하! 횡재했군. 시즈, 오늘은 좀 많이 먹어도 되지? 먹고 푹 쉬자!" 

보를레스는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행인 시즈가  엄청난 부자였지만 돈을 쓸만한 곳으로

는 돌아다닌 일이 드물어 편한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뒤늦은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하죠. 그럼 부탁합니다." 

시즈는 웃으며 타로운짜리 금화를 주인의 손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눈매가 갈라질 정도로 커진 주인이 손을 부들부

들 떨었다. 산골에서 금화를 본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벼, 별말씀을‥. 주, 주방장!" 

후다닥하고 달려간 주인은 칼시아를 가져다주고 카운터에 앉아서 금화를 문질러도 보고 물어보도 보고 심지어는 핥

아도 보며 황홀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신기하다는 듯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함께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쳐다본 유레민트는 사람들의 순진한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타로운 금화를 선뜻 꺼내다니 시즈는 부자군요. 하긴‥ 일기장 하나로 번 돈도 엄청날 테니‥." 

"이건 일기장으로 번 돈이 아니에요." 

이미 다른 세계에서의 이방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숨길 것은 없었다. 시즈는 다섯 개의 성신석을 얻게 된 배

경을 말해주었다. 아스틴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외투가 시즈의 소유물임을 알자 일행은 모두 즐거워했다. 

"제가 횡재를 한 거죠, 뭐." 

"그건 아니에요, 시즈. 횡재를 한 쪽은 저희 박물관이죠." 

싱글싱글 웃으며 유레민트가 말했다. 

"전에 미헬씨가 말했잖아요. 시즈는 지고인이라고‥. 그렇다면 시즈의 외투는 적어도 고대의 물건을  넘어선다는 뜻

인데 값으로 어떻게 따질 수 있겠어요?" 

"그렇군요. 이거 너무 싸게 받은 게 아닐까요?" 

"하하하하핫!" 

오랜만에 그들은 신나게 웃어댔다. 음식은 맛이 좋았고 주인이 추천한 칼시아 주는 시원하면서도 적당한 취기를 선

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