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4화
"아니, 얼음의 대지에 다녀왔다고요? 그것 참! 이제 보니 대단한 모험가들이셨군. 하긴 그렇지 않다면 타로운 금화
를 덜렁 내놓을 배짱이 있을 리가 없지. 나도 젊었을 때는 꽤나 이름 날리는 모험가였지. 세일피어론아드 6대 금지
를 마음껏 나다니는 모험가 말이야‥."
새로운 손님들이 돈 많고 성격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달려왔다. 한 평생 보기 힘들다는 미녀
가 둘이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은발의 가냘픈 청년과 우람한 검사가 있다는 소문에 여자들도 우르르 몰려
왔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딜 가나 입담꾼이 있는 법. 산골 대장간이라 곡괭이나 만들 줄 안다는 50대 중년 사내는 손짓
발짓을 다하며 의심이 다분히 가는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멀리 떨어져서 술을 마시는 주인이 중얼거렸다.
"저 친구, 버릇 또 나왔군."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시즈와 아리에, 유레민트와 보를레스는 즐거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주 그들에게서 본전
을 빼기로 작정을 했는지 술을 권하느라 난리였고 술에 약한 여인들은 벌써 탐스럽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리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는 유레민트는요? 아하하핫! 얼굴이 사과 같아요."
어딘가 나사가 빠져버린 듯한 웃음소리로 아리에가 놀리자 유레민트는 입술이 한 자나 튀어나왔다. 평상시라면 온
화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쳤을 그녀지만 술의 능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리에야 말로 빨갛다고요! 사과가 아니라 다 익은 딸기 같이 빨게요."
술잔을 막 부딪히고 입으로 칼리스를 털어 넣은 보를레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즈에게 속삭였다.
"정말 어이없는 내용으로 다투는 군."
"그렇군요."
"뭐라고요?"
그들이 술이 취해서 목소리가 컸는지 아니면 두 여인이 술에 취해 청각이 예민해진 건지 유레민트와 아리에는 벌떡
일어섰다. 천방지축이 된 두 여인을 보며 사람들은 재밌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 중에 나이 먹은 아주머니는 두 사
람에게 충고를 했다.
"여자는 술을 마신 날에는 남자를 조심해야 돼. 혹시 저 두 남자가 못미덥거든 우리 집에 와요. 편히 재워줄 테니
까."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 없다고요!"
"속단은 금물이에요. 남자란 속에 늑대가 스무 마리쯤 들어서 언제 여자를 잡아먹을지 기회를 노리는 동물이니까."
아리에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소리치자 아주머니는 더욱 걱정스러워 하며 말했다. 여자라면 '늑대'라는 동물에 대해
어릴 때부터 주의를 받고 자란다. 무심결에 아리에는 시즈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길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떠는 시즈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는 충고한 아주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요. 시즈는 그럴 마음이, 아니 그럴 배짱이 없는 남자라고요. 늑대라고 다 똑같겠어요? 가끔
이빨 안 난 늑대도 나오는 법이죠."
"보를레스, 칭찬으로 안 들리는 건 제 귀가 이상해서 일까요?"
시즈는 묘한 기분에 보를레스의 귀에 속삭였다. 보를레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닐 걸. 내 귀에도 좋게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두 남자가 한탄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이상한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날 남자를 내버려두는 것은 여자가 할 행동이 아니지!"
"저기, 아리에. 뭔가 바뀐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유레민트. 이런 날은 약간 바뀌어도 괜찮아."
힐끔‥. 아리에를 쳐다본 시즈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나, 오늘 위험한 거죠?"
"괜찮을 거야‥."
보를레스는 한숨을 쉬며 시즈를 안심시켰다. 정말이지 역할이 많이 바뀐 듯 싶었다. 난장판이 되어 즐기던 밤도 늦
어서 다들 테이블에서 골아 떨어지고 시즈와 보를레스는 누군가 건들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으음‥."
"자네들, 일행을 방으로 데려가지 않고 뭐하는 건가? 남자들이 되었으면 여자를 책임을 져야지. 누가 엎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예. 감사합니다."
보를레스가 겨우 눈을 떠서 바라보니 아리에와 유레민트에게 남자는 늑대라고 열변을 토하던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미묘한 웃음을 얼굴이 띄우고 시즈와 보를레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좋은 밤 되라우! 아까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마. 밤에는 밤의 역사가 있는 법이지. 오호호호홋‥."
남편을 들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 시즈는 진정 무서운 여자는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축 늘어진 아리에를 안아든 시즈는 먼저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다.
"방이 어디죠?"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족으로 두 번째."
계단을 올라가서 방을 찾은 시즈가 침대에 아리에를 뉘이며 빙긋 웃었다. 음냐하고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이 귀여
웠다. 뒤를 돌아서려고 할 때,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휘익! 하고 인기척이 강하게 났고 시즈는 막 방안으로 들어서려던 보를레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쾅! 철컥!
어느 새 그의 시야는 어둡게 가려졌다. 하지만 빛을 삼키는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아리에를 본 것 같았다.
"시즈!"
닫혀버린 문밖에서 한 차례 당황한 보를레스는 현실을 깨달았다. 잠시 후 턱을 쓰다듬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
돌았다.
"저 녀석, 정말로 당하는 거 아니야? 아리에 녀석, 불안했나 보군. 뭐‥ 나야 나쁘지 않아‥ 흐흐흐‥."
품에 안겨서 입술을 오물거리고 자는 유레민트를 환상에 빠진 듯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남자들의 방으로 예정됐던
곳으로 들어갔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