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5화
"꺄아아아아아악!"
깊은 밤은 곧 설익은 해와 함께 아침을 몰고 왔다. 시즈는 갑자기 들려온 비명이 너무나도 가깝다는 느낌에 고요하
게 감겨있던 눈을 바로 떴다. 투명한 동공에 초점이 잡히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시즈는 무
슨 일인지 울먹이는 아리에를 보고 무심결에 달래기 시작했다.
"아리에,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지?'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즈는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런데‥ 아리에가 왜 여기에 있죠?"
"뭐야!?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오크! 오우거! 트롤! 이런 녀석한테 당하다니‥."
그녀의 얘기에서 묘한 여운이 날림을 느낀 시즈는 방을 휘익 둘러보았다.
"분명히 우리 바‥아앙이‥ 아니네."
멍한 음성. 속옷만 입고 얼굴을 붉힌 채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아리에가 묘한 상상을 재촉했다. 그는 휘둥
그레진 눈을 돌려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철컥철컥!
"무슨 일이야! 시즈."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을 열어재끼고 들어온 보를레스가 돌처럼 심각한 얼굴로 다그쳤다. 그리고 발가벗다 싶은 남
녀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후다닥 다가온 그는 시즈의 어깨를 잡으며 흐늘흐늘 일렁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좋은 밤이었나? 친구."
"보를레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무슨 소리긴‥. 난 지금 상황을 보고 추리한 내용으로 축하를 건넬 뿐이야."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보를레스."
"글세‥. 너랑 다를 바 없지."
"그, 그런데 왜‥."
문이 열린 걸 보고 유레민트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보를레스가 먼저 와 있는 걸 보고 미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자 보를레스도 넋 나간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고, 상황을 이해 못한 아리에와 시즈만 얼굴에 곤혹스러움
을 가득 드러냈다.
"아리에, 일어났어요?"
"으응‥. 유레민트, 얼굴이 빨게요."
"괘, 괜찮아요. 남자분들, 아리에도 옷 좀 입어야 하니까 고개를 돌려주시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를레스와 시즈는 아예 뒤돌아서 있었다. 시퍼렇게 뜬 아리에의 두 눈이 빛나고 있는데 어찌
훔쳐볼 생각을 할까? 그 때, 옷을 입은 아리에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아리에? 왜 그래요? 아픈가요?"
유레민트가 살펴보니 아리에는 하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문득 든 생각에 유레민트는 시즈를 노려보았다.
"처음이었을 게 분명한데 조심했어야죠!"
'대, 대체 뭘!?'
시즈는 어깨를 으쓱하며 결백을 증명해보려 노력했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앉아있던 옆자리에 작게 묻어있는 핏자국
을 발견했던 것이다. 약간 흩어진 핏자국은 상당히 격렬한 움직임 중에 떨어진 게 분명했다. 시즈는 어깨를 축 늘어
뜨렸다.
이쯤 되자 아리에도 그에게 다가섰다.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는 먼저 내려간다며 사라져버렸고 바짝 들이댄 검은 눈
동자에 당황한 시즈가 비췄다.
"그렇게 싫어? 나랑 이런 관계가 된 게‥."
"시, 싫지는 않아요. 그저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아리에한테도 미안하고‥."
시선을 피한 창백한 얼굴 가득히 붉은 기운이 돌았다. 후훗하고 웃으며 아리에는 그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네가 좋으니까."
포근한 감촉이 시즈를 감쌌다. 그가 부른 바람 속에 있을 때만큼 상냥하고 부드러운 느낌.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아리에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베시시 웃는 아리에와 함께 식당으
로 내려가며 시즈는 슬쩍 물어보았다.
"근데‥ 아리에. 어제 일 기억나요?"
"아니, 하나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시즈는 볼을 긁적거렸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지난밤의 시간, 잠시 돌아가 보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 아리에!"
"흐흐흐흐‥."
어둠 속으로 보이는 그림자의 음흉한 웃음소리. 소름이 돋아난 팔을 잡고 뒷걸음질치는 시즈를 그림자는 재빠른 움
직임으로 어깨를 잡아 눌렀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신비롭게 빛나는 은발이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머리카락이 예뻐‥. 눈동자도 호수 같아."
남색의 하늘과 푸른 달이 담긴 투명한 눈동자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리에의 뜨거운 입김이 콧 끝에 닿았다. 그토
록 술을 마셔댔는데도 좋은 냄새가 향긋하게 감돌았다. 시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입김이 흘러나오는 주체가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으악!"
퍽!
다급하게 일어난 시즈의 코가 아리에의 이마에 직격했다. 비명을 지르며 코를 부여잡은 손가락 사이로 흐른 액체가
침대보에 똑똑 떨어졌다.
"괜찮아?"
"수건 좀 줘요."
코를 꼭 누르고 있자 이내 피는 멎었다. 그러자 아리에는 다시 시즈에게 엉겨붙었다. 술을 먹어서인지 반항하기 힘
들었다. 어쩌면 반항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당했구나(?) 싶었을 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살
짝 눈을 뜨자 안긴 상태로 아리에가 잠이 들어있었다.
"하.하.하.하‥. 에휴∼."
이토록 고생을 시키다니 아리에는 절실했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코를 간질이는지 움
찔거리는 모습이 고양이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살며시 치워주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덥칠까‥?"
시즈도 남자인데 욕망이 없을까. 촉촉하게 붉은 입술과 옷깃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우유빛 살결을 슬며시 흘낏거린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돼! 안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욕망을 떨쳐버린 그는 달아오른 눈길을 여름밤을 시원하게 비추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
둠에 가려 반쪽이 되어버린 둥근 달. 네 나머지는 어디에 있나? 사실 붙어있지만 어둠에 가려, 빛에 가려 보지 못하
고 있나?
하얀 꿈을 꾸고 있네 어디인지도 모른 채
어둔 세상은 모두 잠들고 나의 숨소리뿐
난 취해 가는데 깨워주는 사람은 없네
몸을 뒤척여 너를 부르네
소리도 없는 나의 슬픈 노래는 까만 허공을 채우고
울먹이는 날 위해 무심한 밤은 다시 나를 재우고
눈물로 젖은 내 술잔 속엔 나의 웃음이 또 한숨이
출렁이는 달빛에 흘러가네
날 깨어줘 네가 없는 꿈속은 싫어
아무도 없는 하얀 꿈속에
너를 한없이 부르네 루루루....
〈전람회 - 꿈속에서〉
"루루루‥ 루‥."
더 이상 달빛의 쓰다듬에 견딜 수 없었을까. 시즈는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작은 숨소리만 가득히 방안에 채워갔다.
잠시 후‥.
"더워어‥!"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난 아리에는 스륵스륵 잘도 옷을 벗어던졌다. 흘깃 옆을 바라보니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역시 내가 좀 취했나봐‥. 유레민트의 금발이 은발로 보이다니‥. 으음‥."
그녀가 이불 속을 파고들며 이 날의 사건은 시즈의 노래처럼 조용히 꿈 속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