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200)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10화

"어떻게 됐지?" 

"당신이 말한 그대로 했소." 

노르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주보고 있던 청년은 그 미소의 이면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도대

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약속은 지키겠지요?" 

"플로먼의 단검은 틀림없이 돌려준다.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주도록 하지." 

노르벨은 품에서 고풍스런 문양의 칼집에 갇혀있는 짧은 검을 꺼냈다. 그 순간 청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니오. 우리는 의뢰가 끝난 후에 받아도 늦지 않소." 

검은 보자기로 둘둘 말아놓은 듯한 사내는 현 플로먼의 가주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가진 권위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것은 '플로먼의 단검'이라고 지칭되는 가주들의 권위를 상장하는 신물이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도

난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어쌔신으로써  정정당당하게 전(前) 가주를 암살했으니까. 언제나  가주의 아이들은 

플로먼 중에서도 특수한 약과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제껏 플로먼의 단검이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간 일이 없었

다. 

"그럼 그렇게 하지." 

막 꺼냈던 단검을 노르벨은 다시 집어넣었다. 

'어차피 단검을 손에 넣으면 날 제거하겠지.' 

노르벨은 플로먼의 가주가 왜 여유를 부리는지 내다보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곧 단검 하나에 권력을 걸고 경쟁한

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게 될 시간이 찾아올 테니‥. 

"아! 그것은 알아보았나?" 

"그리스에 대한 정보 말이오?" 

가주는 몇 장의 문서를 건넸다. 노르벨의 눈이 문서 표면에 쓰여진 글자를 훑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무척이나 평범하군." 

"역시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나 보군요. 실베니아 남부 소즈누 지방에서 출생. 6세에 상인인 부친을 따라서 아스틴

으로 이주. 한 마법사의 눈에 띄어 13세부터 마법을 배우기 시작. 그 뒤로도‥마법사의 일생에서 특별한 인연을 얻

지는 않았군요." 

뭔가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노르벨은 소득이 없자 실망했다. 플로먼 가주는 문서를 하나하나 넘기더니 흥

미롭다는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특별한 인연이 있군요." 

"뭐지?" 

"역사의 고리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 

"날 놀리나?" 

노르벨은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게 그의 정보를 궁금해하는 거요?" 

반대편에 털썩 앉아서 플로먼 가주가 물었다. 

"간단해. 그에게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없었으니까." 

"미치광이 일수도 있잖소." 

"무엇인가에 이유없이 미치는 자를 난 보지 못했다." 

세일피어론아드 자체를 없애면서 이루려고 하는 광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로 미치광이 광대 노릇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의지가 있다면 의지를 만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싸우는 

내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건 아닐까요?" 

귀가 흘깃하여 돌아본 그는 이내 플로먼  가주가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눈웃음을  치며 가리킨 곳에는 '여자 

관계'에 대해 나와있었는데 '애인, 에즈민.'이라고 쓰여있었던 것이다. 콧주름이 사자의 것처럼 잔뜩 흔들렸다. 

'굉장하군.' 

플로먼 가주는 전신을 떨게 만드는 살기를 즐겼다. 이 정도의 살기를 낼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 노릇

인가. 번쩍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자는 실제로 플로먼  역사상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플로먼의 성을 가진 

이로써는 전혀 웃기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웃었다. 어쌔신도  무예를 익힌 이상 무도가다. 강한 자를 좋아하는 

성향은 마찬가지였다. 

"내 동생은 아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뜨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노르벨이 몸을 돌렸다.  암살자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흥분하는 자는 진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문서를 챙기고 플로먼 가주는 방문을 나섰다. 바로 정보를 수집하러 떠날  것이다. 노르벨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적어도 의뢰에 있어서 플로먼들은 철저하다. 의뢰비는 노르벨이 플로먼으로써 모았던  돈이다. 많다면 많았지, 적다

고 말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벨은 어떤 이유로든 확실한 아군을 만들어 두었다고 확신했다. 

"오라버니‥." 

생각에 빠져있던 노르벨은 퍼뜩 놀랐다. 싱그럽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동생의 것이

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방긋 웃고 있는 에즈민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생글거렸다. 

"어쩐 일이냐?" 

"뭐 하나 싶어서 왔어요." 

노르벨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피하자 에즈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실망하게 되는 법이었다. 노르벨이 내심 놀란 심장을 다스리고 있음을 안다면 그녀는 꽤나 기뻐하리라. 

'아무리 생각에 빠져있었다고 하지만‥.'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 노르벨은 플로먼 가주가 에즈민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

기 히죽거리자 에즈민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번식자를 찾았느냐?" 

에즈민은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운 그녀는  능숙하게 노르벨에게 

건넸다. 

"예전부터 있었는데요. 뭐‥." 

위태로운 웃음. 썩어버린 징검다리를 건너는 자의 기분이 이럴까. 노르벨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끝내 해야겠니?" 

"그럼 오라버니가 해주실 건가요?" 

"그래. 차라리 내가 하마." 

"안 되요. 이미‥." 

고양이 발처럼 우아한 손동작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에즈민은  헤헤 거렸다. 노르벨이 멍해지는 순간이었

다.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선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 그리스!" 

그리스의 휴식 공간인 지하 독방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노르벨은 어둠 속에서도 시퍼런 눈빛을  내며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노르벨‥. 왠 호들갑?"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사내. 그는 혼자 방안에 있으면서도 검은 로브를 벗어놓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서

자 단짝처럼 바닥에 닿아있던 로브도 일어섰다.  횃불에 비친 그의 표정에는 휴식을 방해한  손님에 대한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화가 난 노르벨이 그따위 것에 아랑곳 할 리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그리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영문을 모르겠군." 

"에즈민에게 몽충을 번식시켰지 않나!?" 

"아아‥! 에즈민이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군. 오빠인 자네가 몰랐다니 의외로군." 

그리스는 말을 하며 노르벨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꿈쩍도 하지 않자 눈썹을 찡그렸다. 

"이 팔을 놓아주겠나?" 

"‥‥당장‥!"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대는 노르벨의 음성에 그리스는 귀를 가져다댔다. 

"당장! 몽충을 해소시켜!" 

"안돼. 그녀의 바램인데 오빠라도 지나친 간섭이 아닌가?" 

"이 녀서어어억!" 

노르벨이 고함을 지르며 그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손에는 시퍼런 칼날을 세운 검을 들고서‥. 그리스는 우습다는  듯 

손을 튕겼다. 

스걱! 

검이 워낙 빨라서일까? 그리스의 팔이 팔뚝부터 뭉떵 잘려나갔다. 그리고 반대팔, 양 다리를 차례차례 잘라버린  노

르벨은 다시 소리쳤다.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크흐흐흐흣!" 

팔 다리가 잘린 주제에 그리스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안돼." 

번쩍 들리는 그의 얼굴, 붉은 광망이 엿보였다. 흠칫 놀란 노르벨이 뒤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니‥. 피도 나오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스의 토막난 몸이  검게 흐물거리더니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되어  입을 쩌억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화, 환상이야! 환상이다!" 

그나마 그리스가 환술가였음을 알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노르벨은 당장에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몰랐으

니‥. 

"환상이라고!? 확신하나?" 

괴물은 흐물거리는 자태를 뽐내며 노르벨에게 은근하게 속삭였다. 촉수 같은 것을 뻗어내어 그를 후려갈겼다. 

"으윽! 아프지 않다!" 

촉수를 막아낸 왼팔이 떨어질 듯 고통을 호소했지만 노르벨은 잠깐 신음을 냈을  뿐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즉

시 그는 그리스가 마련한 '빛나는 무대'의 등장객이 되어 버릴  것이다. 처참한 엑스트라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

다. 

"그렇다면‥." 

어쌔신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짧은 찰나에 여러군데 타격을 입고 노르벨은 바닥에 쓰러졌다.  신음소

리가 돋아났다. 

"크으으‥. 이따위‥ 것!" 

"그만 하지." 

차가운 목소리에 검은 괴물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궁지로 몰아세웠던 존재가  간단하게 사라지자 노르벨은 이를 빠

드득 갈았다.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서있는 그리스가 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봐." 

상처 입은 부위를 감싸쥐고 노르벨은 등을 돌렸다. 말로도 안 되고 무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데 있어봐야 달라질 

게 없었다. 힘없이 걸어나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그리스는 말했다. 

"흠‥. 그래도 남매라는 건가?" 

"그저 가식일 뿐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리고 의자에 몸을 실은 에즈민이 코웃음쳤다. 

"언제부터 있었지? 전혀 몰랐군." 

노르벨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 그리스는 에즈민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에즈민의 잠행(潛行)이 뛰어났지만 

한 편으로는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을만큼 노르벨이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혈연마저 가식이라니‥. 비약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노르벨은 널 진심으로 위하는 것 같은데‥." 

"호호‥. 날 사랑하는 건 진심이겠죠. 다만 그  사랑 자체가 가식이라는 거에요. 생명을 잃는  게 두려워서 참는 게 

사랑이라면 없는 게 낫죠." 

에즈민의 부드러운 입술은 망설임 없이 딱딱하고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수 년 전의 밤

과 다를 바 없는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날, 고통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마주쳤던 노르벨의 눈동자이 그리스를  쏘아보던 지금과 같았다면 그녀는 노르

벨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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