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악장 꿈들의 전쟁 1화
노르벨은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부상을 진찰한 의사가 얼른 팔에 부목을 댔다.
'부러졌나?'
환상에는 강도가 필요 없다. 인간의 몸은 자신의 생각에 예민하니까. 그만큼 의지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
주는 것이지만‥. 암시에 걸리면 몸이 얼마나 빠르고, 힘이 강하고 등의 조건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한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싫은 녀석이야."
예전부터 소문이 매우 무성했던 그리스, 솔직히 한 번 맞붙어보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결국은 소문뿐이 아니었음
을 알았다. 댓가를 상당히 지불했어도 정작 위험할 때 필요한 정보였다.
"하아‥.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그래, 에즈민. 마음대로 해봐라. 정말로 원한다면 절망의 꿈에서 깨지 않게 도와
줄 테니‥."
검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사람의 손에 들려 수많은 피를 보는 마력의 도구인 검‥. 혹
자는 모든 도구는 사용하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손에 무엇이 들렸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존재다.
즉, 검이란 생물에게 상처를 입히고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이미 마력의 도구였다.
그 도구들이 강하게 부딪혔다.
창! 캉!
"흐음‥."
노리스는 강하게 부딪혀 오는 보를레스의 검을 하나 하나씩 쳐냈다.
'크윽! 완전히 괴물이로군.'
반격 없이 그저 방어만 했다. 그런데도 보를레스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손아귀가 찌릿대며 아파왔다. 이제까지 수
많은 강적들과 싸우고 또 겨뤄왔던 그였다. 광풍의 검사라는 멋들어진 별명이야말로 그의 검이 지나왔던 길을 알려
주는 좋은 예였다. 그러나 담력검술을 완성시킨 후로 자부했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지금껏 싸워왔던 누구보다도 쉽게 노리스는 제뷔키어를 방어했다. 걷어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툭툭 쳐낼 때
마다 보를레스의 몸 전체가 휘청거렸으니‥.
촤르륵! 챙!
제뷔키어가 뒤로 튕겨 나가고 보를레스의 하반신에 허점이 드러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유레민트가 눈을 꼭 감고 다
음 순간 일어난 상황을 외면했다.
"읍!"
"호오‥."
츠바틴과 로진스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살그머니 유레민트가 눈을 떴다. 그녀가 우려했던 상황과는 반대로 보를
레스는 멋지게 노리스의 검을 막아냈다. 팔이 부들거리기는 했지만 방어를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그의 얼굴
에는 미약한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로진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검술에 걸신들린 사람 같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그리도 좋은가?"
"그러는 자네는 어떤가? 저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만 자네는 광범위하게 죽이지 않나?"
"마법을 살인기술 따위와 비교하지 말라고! 마법은 우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야!"
"학문!? 언제부터 학문이 그렇게 난폭해졌지?"
"두 분 다 그만하시죠."
보를레스와 노리스와는 달리 입으로 다투는 두 사람을 지나쳐가며 시즈가 조용히 말했다. 보기에 민망하다고 느꼈
을까? 두 장년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검술에 빠진 것 같아. 저 두 사람."
아리에의 말에 시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는 투로 아리에는 말을 이었다.
"노리스님도 특이하지. 어떻게 대련을 하면서 벨루온까지 걸어가자고 할 수 있지?"
"뼛속까지 검사인가 봅니다."
벌써 6일째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들려오는 검의 소리에 아리에는 해탈의 지경에
이르렀다.
'검소리와 새소리는 모두 마음에 달렸으니‥.'하고 중얼대자 유레민트가 키득대고 웃었다. 엘프의 눈에도 벅찬 여정
을 하루종일 검과 대화를 나누는 검사들은 경이롭게 보였다.
한 편, 안내를 책임지고 있는 츠바틴은 지도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되겠지만
평범한 지도도 그의 손에 붙들리니 특별해졌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또!?"
"이 부근에 서적을 숨겨둔 동굴이 있어."
다른 이들은 몽충이 번식해서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전에 막아야한다고 했지만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싸
울 지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움직였다가는 허무한 결과를 낳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뇌가 가진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그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도에서 역사의 고리가 자료를 숨겨두었던 곳
을 감촉같이 찾아내는 것이다. 필요할 듯 싶어 예전에 기억을 했다고 말했지만 오는 길에만 10여 군데의 자료실을
들춰보았다. 노리스는 '아마 세일피어론아드 전역을 꿰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대륙 최고의 학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으음‥. 여기도 있군. 이 것 좀 보라고, 시즈."
"같은 내용입니다."
서고에 들어가면 적어도 두 세시간은 소비해야 했다. 수많은 책과 문서더미에서 몽충에 대한 자료를 찾는다는 것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연구자료였기 때문에 퇴치 방법이나 방어방법을 찾기는 백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
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대륙 최고의 학자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 리 없었다.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칠인으로 꼽히는 유레민트, 그
녀는 눈부신 속도로 자료를 정리했다. 츠바틴과 로진스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으니 어느 정도 책을 빨리 본다 자
부하던 시즈는 어린애 수준에 불과했다.
성과는 있었다. 몽충의 정보를 상당 부분 알게 된 것이다.
감염자를 악몽에 시달리게 하여 꿈과 현실의 구분을 갈라놓는다. 꿈의 현상을 실제라고 믿게 된 감염자는 그 의지
에 따라 빨리는 하루에서 늦게는 한 달 여의 시간을 둘 뿐 모두 사망한다. 일종의 끝없는 고문이나 다름없기 때문
이다. 꿈을 현실이라 인정하고 의식을 놓아버리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된다.
또 몽충이 부화되는데는 번식자의 꿈을 한 달 이상 먹고 자라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 달 동안이라는 거군."
"그 기간을 믿는 수밖에."
감염자의 의식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퍼지는 게 바로 몽충의 무서운 번식력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몽충에 대한 소
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부화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지금쯤 번식자의 몸에서 몽충이 꿈틀댈지도 모르고, 아
직도 번식자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최악의 상황으로 고려하는 게 어떨 때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역시 없습니다. 없애는 방법이‥."
"흠‥. 이걸 보게."
"이것은‥."
츠바틴이 내민 한 장의 쪽지‥. 로진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뇌했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뭔데 그래요?"
시즈와 유레민트가 즉각 달라붙었다.
"별 거 아니야. 만약, 몽충은 희망의 꿈을 먹고, 절망의 꿈을 배설하지. 그래봤자 꿈은 인간의 의식이니까 꿈과 현실
을 구분시킬 수 있다면‥."
"그 말은 그리스의 암시와 같다는 것 아닙니까? 음유술사나 대항이 가능한 암시를 무슨 수로‥."
방법을 찾았다는 말에 땀에 흠뻑 젖어 달려온 보를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씬 풍겨오는 땀냄새에 얼굴을 찌푸
리고 로진스가 고개를 저었다.
"몽충은 음유술사의 의지를 가진 게 아니야. 말했지 않나, 몽충은 희망의 꿈을 먹고 절망의 꿈을 배설한다고. 몽충
의 양분은 즉, 인간의 꿈이지. 그 꿈은 누구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인간의 의식이라는 거군. 가능성이 있겠어."
노리스마저 들어오자 서고는 완전히 코를 찌르는 냄새에 가득 찼다. 노리스는 왜, 학자들이 대답을 안 하는지 물었
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없이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맑은 공기가 코에 닿을 쯤에야 숨을 몰아쉬는 이들. 그제서
야 상황을 이해한 노리스와 보를레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땀냄새 정도로 호들갑인가?"
"자기 냄새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당장 서고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마, 그 곳의 자료들이 썩어버릴 거야."
"비약이 심하오."
기분이 상했는지 보를레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때, 두 검사의 머리에 모포가 한 덩어리씩 날아왔다. 멀리서 아
리에가 조용히 말했다.
"기분 상해하지 말고 씻고 오면 되잖아요. 솔직히 하루 이틀 안 씻었어요?"
"그렇군."
남자가 말할 때와 여자가 말할 때는 이렇게 다른 것이다. 로진스가 말할 때는 오히려 투덜대던 두 사람은 아리에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얌전히 냇가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리에는 허리에 양손을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밤하
늘에 별빛 같은 윤기가 흐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하여간 못 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