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악장 꿈들의 전쟁 2화
적이 같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이렇게 가까워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행 사이에 막고 있던 묘한 거리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를레스와 노리스는 말만 안했지 사제지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검을 겨누겠지?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복잡한가? 뭐가 단순하고 복잡한지
시즈는 더 이상 구별하기를 그만 두었다. 인간이라는 생물을 분석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일이면 벨루온이로군."
"네."
은근슬쩍 츠바틴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정말 멋진 달이야."
"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달을 참 좋아했지. 우리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 넋이 나간 주제에 밤이면 성벽에 올라가서 달
을 바라봤으니까."
"‥네."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츠바틴은 만족했는지 함께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들썩한 뒤를 돌아보고
다시 말을 꺼냈다.
"보를레스라는 친구. 괜찮은 사람이야."
"네‥."
"내일이면 사람들이 모두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그는 대담하니까요."
츠바틴은 껄껄대고 웃었다. 어찌 보면 부러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허탈한 음성이 입술을 뚫
고 새어 나왔다.
"노리스와 난, 노예였다."
"두 사람이 말입니까?"
50여 년 전, 대륙 전체에서 성행하던 노예사업은 우선 엘프와 연합한 아스틴에서부터 점차 사라졌다. 능욕적 노예로
각광을 받던 게 바로 엘프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사막의 나라, 볼케아스에서만 아직도 노예 사업은 대대적으로 이
루어졌다. 때문에 각 국의 부호나 귀족들은 몰래, 볼케아스에서 노예를 사오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실제 노예였다는 것은 놀라웠다. 시즈의 경악 섞인 반문에 츠바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노예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끌려왔다고 들었지. 우리는 말을 배울 때부터 철저하
게 노예 교육을 받았다. 주인님은 신이고 다른 사람은 인간이고 노예는 가축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당시에는 그게
하늘이 정한 법칙으로 믿었다."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억울함이 없었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손과 발
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힘들다는 이유로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눈물 따위는 여자들에게나 통용되는 방
법임을 알았다. 그들의 눈에서 물빛이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행동이 느려지면 채찍은 날아왔다.
그래도 그들은 부근의 노예 중에서는 선택받은 존재였다. 주인이 무척이나 부유했던 그들은 헛간에서 염소들과 섞
여서 잠을 잤고 배가 고프면 염소젖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노예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가혹한
일을 하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노예로 팔려온 한 엘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불모의 땅을 건너 남쪽에는 노예가 없는 땅이 있단다. 난 그 곳에 있었어. 언젠가 꼭 돌아갈 거야.'
거짓말이라고 치부했다. 그렇다. 절망에 지친 미친 엘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뇌리에 맴돌기에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찌르는 주인의 비명소리가 울러 퍼지고 그 자리에는 츠바틴이 서있었다. 채찍 자국으로 장식된 너덜너덜한 등
가죽을 돌린 채 그는 양손을 피로 물들인 상태였다. 손에는 곡괭이가 부러졌던 조각인지 뾰족한 금속이 들려서 그
끝에는 피에 찌든 내장 조각이 걸려있었다.
노리스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츠바틴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멍하게 서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쫓아왔지만
선천적으로 신체가 뛰어난 노리스는 야수처럼 빨랐다.
결국, 그들은 몸 여기저기에 화살을 꽂은 채로 탈출에 성공했다.
"츠바틴, 츠바틴! 이 바보같은 녀석아.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주인을 해치다니!"
"노리스, 노리스! 이 바보같은 녀석아.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주인을 해친 노예를 구하다니, 죽는 사람은 나로 충분
했어."
갈 곳이 없었다. 주인의 가족은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그들을 잡기에 핏발을 세웠다. 결국 그들은 쫓겨서쫓겨서 사막
으로 나갔다. 아무 것도 없는 모래의 땅에서 츠바틴은 말했다.
"기억해!? 노리스. 그 엘프의 말 말이야. 불모의 땅을 건너 남쪽, 노예가 없는 땅이 있다고 했지‥."
"불모의 땅을 건널 수 있을 리가 없어."
어렷을 때부터 교육받았던 노예의 지식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볼케이스의 노예상인은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도
록 사막이 죽음의 땅으로 가르쳤다. 주인 없는 노예가 사막을 건너면 유하의 요괴가 찾아와 낮에는 굽고, 밤에는 얼
린다고 했다.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굽고 얼린 노예를 요괴는 먹어치우고 그 자리에 뼈만 남긴다고 했다.
고작 10세를 간신히 넘어선 소년들이었다.
낙타의 뼈를 보고 츠바틴는 절망했다.
"저 낙타도 주인 없는 노예였을 거야."
"그런 소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사막을 건널지 생각해봐."
"낙타도 못 건너고 뼈만 남았으니까 하는 말이야."
츠바틴의 말은 옳았다. 능숙한 모험가라고 해도 사막을 맨몸으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낙타 하나에 여
러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모래 속에 박힌 발을 빼내지 못하고 꼬꾸라졌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폭우인 사막의 비
는 금새 강을 만들고 세차게 흘렀다. 우연은 또 하나의 행운을 낳았다.
강이 생겼으니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은 식수가 넘쳐서 어깨가 무거울 지경이 아니라면 강변을 따라서 움직였던 것이
다. 두 소년은 그 곳에서 용병국으로 가는 상인 집단을 만났다.
"노예가 없는 나라!? 하하핫! 재미있구나."
마차 안에서 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은 행렬을 책임진 대상(大商)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 말에 괜시리 쑥스러워
진 노리스가 츠바틴을 쏘아붙였다.
"그 것 보라고! 미치광이 엘프가 한 말을 믿다니!"
"너도 믿었잖아!?"
티격태격 싸우는 그들을 보고 한참을 웃은 대상(大商)은 말했다.
"미치광이 엘프라‥. 아직도 노예 산업이 번성하고 있다더니‥. 이 정도로 철저했었구나. 그래‥. 저걸 보려무나."
대상은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차를 가린 천을 거뒀다. 두 마리의 낙타 머리 위로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끝으로 서서히 보이는 푸른 빛깔의 대지가 신비롭게 눈에 들어왔다.
두 소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미치광이 엘프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상은 감격에 젖은 두 사람에게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단다. '불모의 땅을 건너서 북쪽으로 노예를 사고 파는 땅이 있다네.'라고‥."
그는 소년들에게 지도를 보여주고 각 나라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실베니아 사람이라고 말했
다.
대상은 모든 면에서 친절했지만 소년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말에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츠바틴과 노리스
의 상처에서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한 그는 지도의 동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카로안에서 내리는 게 좋겠구나. 이 곳은 용병국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용병이라는 직업은 적어도 네게는
맞을 듯 싶구나."
마지막 한 마디는 노리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침, 그의 행렬을 지켜주는 용병은 카로안 출신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은 그에게서 카로안이라는 나라와 용병이라는 것에 대해서 듣고 배웠다.
"용병은 청부사업을 한다. 사람들의 의뢰를 해결해주고 수고비를 받는 거지. 그 의뢰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도,
또 보호해야 하는 것도 있다. 어떤 때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기도 하지. 매우 위험한 직업이야. 하지만 자유롭지."
'자유롭다.'라는 말이 노리스와 츠바틴의 온몸을 강타했다.
실제로 카로안은 두 소년이 꿈꾸던 모험의 땅이었다.
천성적으로 건장한 육체와 야성적인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던 노리스는 몇 년 사이에 용병들 사이에서 빠르게 부상
(浮上)했다. 몇몇의 이름 있는 용병단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노리스는 재정관리에는 수완이 없
었다.
츠바틴은 노리스가 벌어온 돈을 가지고 용병활동에 필요한 장비나 물품을 샀지만 여러 가지 책을 샀다. 외모가 단
정했던 그는 노예 시절, 주인의 시중을 들기 일쑤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둬야 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한 그
는 며칠 밤이 지나도록 책만 붙잡고 있기도 했다.
카로안 왕실의 경비대 서기가 된 츠바틴은 탁월한 업무능력을 받아서 조금씩 승진했고 그 뒤를 이어서 노리스가 경
비대에 들어왔다.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노리스는 금방 검술을 인정받았다.
다시 몇 년이 흘러서 또 다른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역사의 고리'라는 단체에서의 유혹이었다. '원의 힘'이라고 지
칭되는 그들은 한 때 '자유'라는 이름에 이끌렸던 그들을 '최강'이라는 단어로 유혹했다. 단순한 이유였지만 수년과
용병과 부대끼며 노리스와 츠바틴의 의식은 변화되어 있었다. 강한 집단에 들어가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의 고리에 몸을 담았다.
역사를 유지한다는 허울좋은 이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서 검을 내지르다가 정이 쌓인 이들을 잃
고 다시 그 복수에 눈이 멀었다.
"이유 따위를 신경 쓰면서 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바빴다."
츠바틴은 낮게 말했지만 힘이 있었다. 삶 자체가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
했다. 돌아보니 시즈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미소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츠바틴은 알지 못했다. 혹시
나 달을 쳐다보느라 듣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삶조차도 잃고자 한다면 나는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