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저는 준비됐어요. (3/101)


3화. 저는 준비됐어요.
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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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설명했어.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 형님네는 안 올 거고 밥만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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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열심히 밥 먹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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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응원하지.”

덤덤한 말투지만 어쩐지 희미한 웃음이 묻어났다.

하연이 힐긋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입 끝에 걸린 미소를 보자, 별안간 예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현듯 속초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에 묻어온 희미한 바다 냄새, 저녁 무렵 아름다운 일몰, 그리고 그의 희미한 미소.

그 시절 앳된 스물의 하연이나 결혼을 앞둔 스물일곱의 하연이나, 그를 보면 여전히 심장이 격하게 울려댔다.

하연은 빨긋해진 볼을 감싸며 자꾸만 현조를 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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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 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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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요. 조심히…… 가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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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현조는 차 문을 열다가 뭔가 망설이는 하연의 얼굴이 밟혀 다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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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애썼어.”

예기치 못한 말에 하연은 커다란 눈만 슴벅거렸다.

분명 무심한 어조인데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아 심장이 사르르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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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게.”

이 짧은 인사가 왠지 오래된 연인의 대화처럼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현조가 했던 말의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아 그가 떠나간 골목에서 한참을 오도카니 서 있었다.

*

현조의 본가.

하연은 널따란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집에서 인사하는 법부터 대답과 표정까지 거울을 보면서 연습했지만, 막상 문 앞에 서자 잔뜩 긴장됐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심호흡을 길게 한 후 준비됐다는 의미로 현조를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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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열심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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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끝에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았다.

현조의 부모님, 그러니까 태상 그룹의 회장 내외를 만나는 자리다.

간간이 뉴스에서만 보던 분들을 직접 만날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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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긴장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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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할 수 있어요. 전 고등학생 때 연극반이었으니까요.”

느닷없는 말에 현조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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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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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며느리 역할 잘할 수 있어요. 매번 행인만 하다가 3학년 땐 조연도 한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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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씩이나.”

현조가 놀리듯 말하자 하연이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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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력이 좀 된다는 거죠. 조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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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연기력이 왜 필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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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요. 들키면 안 되니까 그렇죠. 정말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것처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연기력이 필요하죠.”

현조는 사랑입네 연기입네 하는 그녀의 말이 참으로 기상천외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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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본 지 얼마나 됐다고 웬 사랑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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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럼 정략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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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도 없던 두 집안이 무슨 정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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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또 그리되나요? 그럼 첫눈에 반한 거로 하죠.”

하연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리더니 옷깃을 툭툭 털었다.

현조는 하연이 하도 당당한 모습이어서 자칫 대답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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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연기 기대할게.”

도대체 무슨 연기를 하려고 이려나.

현조는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켜볼 생각을 하니 꽤 즐겁기까지 하다.

하연은 현조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지나 더 깊숙이 들어가자 두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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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요.”

현조의 어머니가 다가와 하연을 다정하게 반겼다.

온화한 웃음을 가진 조상희는 태상의 ‘그안’ 갤러리 대표로 가끔 잡지에 인터뷰가 실리지만 TV에는 잘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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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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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설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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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에게 이런 예쁜 아가씨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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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감사합니다.”

상희는 하연의 두 손을 맞잡으며 활짝 웃었다.

하연은 옆에 있는 최남호를 보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가끔 TV에서 봤지만, 실물을 접하긴 처음이었다.

지금의 태상을 일으킨, 전 국민이 얼굴을 다 아는 회장님을 마주 보고서야 하연은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했다.

이미 늦었긴 했다만, 태상 그룹의 며느리가 되다니. 저도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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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요.”

최남호 회장은 현조와 비슷한데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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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편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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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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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현조가 일이 있어 좀 늦었으니 배고프겠다. 얼른 식사해요.”

상희가 하연의 손을 잡고 다이닝룸으로 끌었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차려진 식탁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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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과는 처음 사돈을 맺는구나.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국회의원은 없었는데.”

별말 아닌데 하연은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아버지가 거론만 되어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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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만들면 좋죠. 두루두루 연결되면 득이 되지, 실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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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만 하다면야.”

현조가 팔을 뻗지 못하고 앞에 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하연에게 생선찜을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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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혼 준비는 어떻게.”

상희가 결혼이야기를 꺼내자 현조가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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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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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그래도 어른들끼리 상의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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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소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단 안 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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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다. 누가 널 말리겠니.”

상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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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현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데 하연이는 퍽 마음에 들었나 봐.”

생선을 덜어주는 아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상희가 넌지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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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도 참. 뭐 그런 질문을.”

하연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까 분명 첫눈에 반한 것으로 하기로 했으니까 이 타이밍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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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첫눈에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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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이가 먼저 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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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차!’

하연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현조는 제법 그럴듯한 연기를 기대했지만, 실상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첫눈에 반한 거로 한다더니, 제가 반했단다.

현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분위기를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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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제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상희가 더 듣길 원하는 눈치여서 현조가 마지못해 몇 마디 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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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이 착합니다. 욕심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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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상이 참 맑아. 예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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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상희의 칭찬에 하연이 꾸벅 인사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고 대화는 주로 현조가 이끌었다.

왠지 모든 대화는 현조의 선에서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그게 나쁠 건 없었다. 정략이든 뭐든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니까.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신 후 현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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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바빠서 그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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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우리가 뭘 어쩐다고 이리 매정하게 굴어.”

상희는 웃으며 아들을 타박했지만 말 속에 뼈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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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 설명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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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알았다. 좋을 대로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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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례 가능한 날짜 알려주시면 조절하겠습니다.”

현조는 다음 미팅을 잡듯 상견례 날짜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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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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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어머님.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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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다니 다행이구나. 언제든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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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에 꼭 놀러 올게요.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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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결혼해야지.”

다음에는 좀 더 놀다 가겠다는, 나름 신경 써서 마무리하려는 말을 현조가 정 없게 잘라버렸다.

말을 끊어버린 그가 영 못마땅했다.

하연은 갑자기 목소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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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잉.”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아까의 서툰 연기도 만회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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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 씨도 참.”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는 현조의 팔을 손끝으로 찰싹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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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 씨 농담은 참 재미없어요. 그쵸, 어머님.”

커다란 눈을 반달로 접고 손끝으로 입을 가려 정확히 ‘호호’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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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하연의 행동에 현조의 눈썹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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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현조가 재미없긴 하지.”

상희가 당황하는 현조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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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 보겠습니다.”

현조가 상희의 시선을 피해 하연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하연은 정원을 빠져나오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해 현조의 팔을 꽉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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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아파. 그만 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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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죄송해요.”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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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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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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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잉.”

또박또박, 고저 없이 하연이 했던 콧소리를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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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친밀감을 위한 추임새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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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추임새. 난 또. 축농증이라도 있는 줄.”

딴엔 리얼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연은 입을 비죽이 내밀고 고까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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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니 주연은 좀 힘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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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제 연기가 별로였어요?”

다분히 놀리는 말이었지만 하연이 진지하게 받아치자 현조는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차에 탄 후에야 하연은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갈증이 일어 컵 홀더에 있던 커피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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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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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던 건데.”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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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해서 그런지 목이 너무 타서요.”

하연은 창문을 좀 내려 선선한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끼어 시야를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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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상쾌하다.”

차를 처음 타 보는 강아지처럼 두 손을 내리다 만 창문에 올려두고 코를 내밀었다.

빠르게 지나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현조와 함께할 미래를 그려보았다.

어떤 일상일까.

쉽게 상상이 잘 안 되지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거렸다.

오래전, 현조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단번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수려한 외모에 넋 놓고 보곤 했었다.

이 사람은 알까. 그 시절 속초에서 본인을 숨어서 보던 스무 살의 앳된 여자를.

하연은 고개를 틀어 현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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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보지도 않고 시선을 알아챈 현조가 물었다.

딱히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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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잘했죠.”

현조는 느닷없는 말에 잠시 고민했다.

도대체 무엇을.

흘깃, 하연을 살폈다.

하연은 아예 몸을 틀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이 하도 부담스러워 뭐라도 대답하긴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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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조연치곤.”

말이 끝나자마자 옆쪽에서 사나운 기세가 느껴졌다.

현조가 눈동자를 돌려 시야각을 넓혔다. 저를 보는 하연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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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열심히 잘 먹었어.”

겨우 생각해 낸 잘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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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기본이고요. 이상한 행동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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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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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끼만 있었더라면 전 배우를 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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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꼭 하려고 했던 말은 아닌데 배우라고 하니 하도 어이가 없어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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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제가 못할 것 같아요?”

하연은 새치름한 표정으로 톡 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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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신은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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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키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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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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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배우라면 응당 키스 신도, 더한 신도 할 수 있어야 하지요. 입술 부딪치는 정도는 껌이죠, 껌.”

목소리의 톤이 평소보다 높아진 건 분명 당황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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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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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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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신을 껌으로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기를 응원한다고.”

하연은 현조와 대화하면 할수록 끝은 노상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집요하게 흘겨보았다.

가지런히 다물어진 입매와 정면만 응시하는 눈빛, 매끈한 얼굴 근육이 하도 정갈해서 정말 놀린 건지 의심스러웠다.

*

서로의 집에 인사를 다녀온 뒤 현조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주 뒤에 바로 상견례를 하고 곧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철저하게 현조의 바쁜 일정에 의해 계획되었다.

현조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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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보낼 테니까 호텔에서 보지.’

 
그가 말한 호텔은 선을 봤던 태상 계열사 W 호텔이었다.

이 늦은 시간, 호텔에서 보자고?

현조가 호텔로 부른 이유를 하연도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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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데 할 건 해야지. 부부니까 당연한 일인걸.”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심장은 벌써 요란스럽게 두근거렸다.

현조가 보내준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전화한 후 현조를 기다렸다.

하연은 막상 눈앞에 닥치자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애도 한 번 안 해봤는데 이걸 어쩌지.

초조함에 로비를 오가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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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 건가? 어후, 손이라도 잡아봤어야 뭘 알지!”

그러다 현조와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어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볼을 지그시 누르며 해죽해죽 웃다가 퍼뜩 정신이 돌아와서 손부채질로 열 오른 얼굴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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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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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깜짝이야!”

언제 왔는지 현조가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무레한 뺨을 하고선 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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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지.”

그래. 인생을 걸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연은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객실 방문 앞에 선 현조가 안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려 할 때 하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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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준비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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