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26/101)
26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26/101)
26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2022.03.31.

돼지 찌개에 들어갈 돼지고기를 썰다가 칼을 우뚝 멈췄다.

“없어요. 아무 일도.”
하연은 팔에 힘을 주어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왜 쪼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어.”

“그냥, 이것저것 과거 생각이 나서요.”
힘 빠진 목소리를 들은 현조는 더 묻지 않았다.
하연의 과거는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시간이기도 했다. 현조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메뉴는 뭐야?”

“아욱 넣은 돼지 찌개요.”

“상상이 안 가는데?”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맛일 거니까 기대하세요.”
하연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소금으로 간한 콩나물무침과 계란말이를 내고 다 끓인 찌개를 냄비째 옮겼다. 그사이 현조는 밥을 펐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내내 하연은 다른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평소 같으면 쫑알댈 하연의 입이 닫혀 있자 현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고민 있으면 말해. 해결해 줄 테니.”
보통은 들어준다고 하지, 해결해 준다고 하진 않는데.

‘이래서 내가 안심하는구나.’
잠시 고민하던 하연이 뭔가 결심한 얼굴로 현조를 마주했다.

“그럼 저한테 뭔가 요구할래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 난 요구할 게 많아.”

“정말요?”

“그래. 정말.”
단호한 얼굴임에도 하연은 어렵게 운을 뗐다.

“저…… 돈 좀 빌려주세요.”
현조가 젓가락을 놓고 하연의 얼굴을 직시했다. 불안하고 창피해하는 게 확연했지만, 그 사이로 확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돈이라.”
현조는 팔짱을 낀 채 턱을 매만지며 하연에게 설명해보란 듯 더 묻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10억이 필요해요.”
10억. 하연의 아버지가 말한 액수였다.

“장인어른 마지막 연락이 언제야.”
흠칫 놀란 하연의 커다란 눈동자는 좌우로 떨렸고 입술은 잘근잘근 씹어댔다. 얼굴이 요란하게 수선을 떨었다.

“혹시 집으로 찾아왔어?”

“저번에 집에 오시곤 한 번도 안 왔어요.”

“그런데 10억은 언제 달라고 했는데.”

“…….”
어떻게 아는 거지. 설마, 그때 다 들은 건가. 돈 이야기는 그가 오기 전에 한 것 같은데.
하연은 현조에게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아버지가 그렇게 큰 액수를 말할 줄 몰랐기에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괜찮으니까 말해. 선볼 때 다 이야기했잖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다 말한 건 아니었다. 상당히 미화시킨 거였다.
하연의 입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현조는 다그치지 않고 머뭇거리는 하연을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날이요. 집에 온 날 말했어요. 10억을 달라고요.”
하연은 현조를 볼 낯이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럼 안 줘도 돼.”

“네?”

“내가 애 낳을 때까진 돈 못 준다고 했거든.”

“아버지와 따로 연락했어요?”

“그래.”
하연은 놀란 것도 잠시,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 애라니요. 그런 이야긴 없었잖아요.”

“그랬던가.”
현조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하연이 경악했다.

“우리가 부부관계도 안 하는데 어떻게 애가 생겨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그럼, 별을 따려면 하늘만 보면 되나?”

“당연하죠. 하늘을 안 보고 어떻게 별을 따요.”

“애가 별인가?”

“아마 그렇겠……죠?”
말이 이상한데?
하연은 몇 마디 오고 간 대화로 현조의 마음을 유추해 보았다.
설마, 아이를 원하는 거야? 아니지. 나를 원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연은 갑자기 더워졌다.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작열감에 손끝으로 얼굴을 부쳐댔다.

“그, 그러니까 아이를 낳으려면 계약서도 그렇고, 그게 쉽지만은 않은데. 그래서…….”
나 뭐라는 거니.
하도 당황해서 나오는 말이 뒤죽박죽이었다.

“쉽지 않으면 어려운가?”
이게 어렵고 쉬운 문제였던가.
계속 질문만 던지는 현조의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하연은 생각지 못한 일에 당면한 터라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캄캄한 야밤, 둘만의 시간, 하늘을 보기?
하늘을 본다고 정말 별이 따지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상상이 펼쳐지는 바람에 이성은 이미 가출한 지 오래였다.
어찌할 줄 몰라 붉은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하연을 현조는 재미있게 관망했다.

“설마, 아이를 낳고 싶다는 건 아닐 테고.”
현조의 냉소적인 어투에 하연의 정신이 제집으로 돌아왔다. 하연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다시 앉아 다소곳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애는 무슨. 그러면 아버지한테 애를 낳으면 돈 준다고 했단 말은 무슨 뜻이지요?”
하연은 아까까지 호들갑 떨었던 태도를 완전히 벗고 차분하게 물었다. 다만 붉은 귀는 좀처럼 제 색을 찾지 못했다.

“낳지 않을 거니까 줄 돈이 없는 거지.”

“하지만 아버지가 언제 또 찾아와서…….”
돈 달라고 할지.
하연은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해 말을 흐렸다.

“죄송해요. 현조 씨한테는 제가 면목이 없어요.”

“그런데 10억을 빌려준다 치면, 어떻게 갚으려고.”
아! 일단 급한 마음에 빌려달라고 했지만 어떻게 갚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잠시 고심하던 하연이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위자료는 안 받을게요.”
하연이 무척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허!”
기막혀 웃는 현조에게 하연은 한술 더 떴다.

“위자료 안 받고 모자라는 건 제가 벌어서 갚을게요.”

“그 월급으로 10억을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쯤 되려나. 에라이, 모르겠다.

“평생 일해서 갚을게요.”
성실함이라도 어필해야겠다.

“꼭 갚을게요. 꼭!”
물론 확신은 없지만.
돈을 주지 않으면 아버지란 사람이 언제 또 찾아올지 몰라 하연은 돈이 꼭 필요했다.
어떻게든 돈을 주고 영영 떼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말해.”

“위자료가 얼마죠?”
그걸 기준 삼아 계산해봐야 하니까.
현조는 고요한 눈동자로 하연을 가만히 보다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농담 한마디에 실컷 허둥대가다 돌연 정색하고 위자료가 얼마냐고 나긋하게 물어오는 하연의 모습이 현조는 재미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죠?”
하연은 심히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좁혀 흘겼다.

“우습지. 네가. 무척.”

“내가 우습다고요? 그거 만만하단 뜻인가요?”
금세 발끈하며 눈썹을 치켜세운 그녀가 현조는 그저 조그마한 새끼 고양이 같단 생각만 들었다.

“아버지한테 줄 돈은 걱정하지 마.”

“주지 않으면 아버지는 현조 씨를 계속 찾아올 거예요.”

“그래도 돼.”
하연은 현조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래요. 현조 씨에게 너무 폐가 되잖아요.”

“괜찮아.”

“아버진 자신에게 득이 안 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돈을 주지 않으면 언제 또 아버지가 찾아와서 난리 피울지.
하연은 죄인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죄송해요…… 이런 저라서.”
하연은 현조가 안 해도 되는 결혼을 해 준 걸 알고 있었다.
단순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결혼이라는 걸 할 만큼 자신은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미안했다.

“저는 결혼하고 많은 걸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현조 씨는…….”

“난, 맛있는 저녁을 매일 먹잖아. 그것만으로도 좋아.”
평소와 다름없는 현조의 목소리가 오늘은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좋아.’
따뜻한 그 말이 하연의 심장에 닿자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연은 울고 싶어졌다. 그가 정말 남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안겨서 위로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다. 부질없는 욕심인 걸 알고 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붉어진 눈가로 하연은 웃었다.
현조는 울 것 같은 하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울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 못마땅했다.
차라리 울면서 매달리지.
울음조차 참으려 노력하는 하연이 현조는 안쓰러웠다.

“알았어. 10억 줄게.”

“정말요?”

“그래. 내가 전해 줄 테니까, 계약서에 조항 추가해.”

“조항이요?”
또 무슨 조항을 추가하려는 거지? 이번엔 뭘까.
현조는 하연의 의심 가득한 얼굴을 일견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밥 먹어.”
조급한 하연은 후다닥 밥을 먹고 현조를 기다렸다.

“과일 먹지.”
잘 찾지 않던 과일까지 달란다.
조항부터 말해주지!
하연은 한소리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손을 놀려 과일을 깎았다.
키위가 두 조각 남았을 때 하연이 냉큼 집어 빈 접시로 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앉아 있는 현조를 눈빛으로 재촉하자 그는 그제야 포크를 놓고 일어났다.

“서재로 가지.”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하연은 잰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현조가 들어와 계약서를 꺼내자 하연은 펜을 들고 준비했다.
현조는 하연 뒤에 서서 추가 조항을 말했다.

“14항. 아내 설하연은.”
하연은 입으로 현조의 말을 따라 하며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열심히 적어나갔다.

“남편 최현조의.”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 남편.
해서 하연은 조금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남편 최현조의.”

“돈을 다 갚을 때까지 혼인은 유지한다.”

“네? 정말요?”
하연이 고개를 돌려 현조를 보며 물었다. 현조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그렇다고 대신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나 계속 살아도 되는 거지요?”
하연은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마음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현조의 묘한 눈길에 하연은 아차, 하고 손으로 입을 살포시 막았다.

“이거, 농담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현조가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런데 제가 지금 벌이로 갚으려면 수십 년 걸리는데요. 괜찮겠어요?”

“괜찮다니?”

“현조 씨가 저랑 오랫동안 살아야 하잖아요. 결혼도 못 하고.”

“결혼은 이미 했잖아.”

“가짜잖아요. 아기도 낳고 가정을 꾸리려면 진짜 결혼을 해야 하잖아요.”

“내 걱정하는 거야?”
현조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하연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지금 저한테 발목 잡힐 판인데.”

“발목 잡히는 사람이 걱정해야지, 왜 잡는 사람이 그걸 걱정해.”

“그렇긴 한데. 어쨌든 저는 괜찮지만, 현조 씨가 손해 많이 보니까요.”

“넌 뭐가 괜찮은데.”

“난 다 괜찮아요. 이렇게 평생 살아도요.”

“그럼 별은 언제 따고.”

“별…… 네?”
현조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걸 보니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하늘을 보니 별을 따니 하는 바람에 놀림만 실컷 당한 기분이었다.

“마저 써.”

“네.”

“아내 설하연의 가사노동은 하루 백만 원으로 계산하여 지급한다.”

“백만 원이요?”
하연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럼 한 달 30일 잡고 3천, 일 년에 3억 6천. 3년이면 얼추 10억 넘으니까…….”
대충 3년이란 계산이 나오자 하연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전에 시어머니에게 들었던, 현조가 3년의 유예를 달라던 그 기간과 같지 않은가.
현조는 3년 후에 이혼할 생각일까.

“왜, 마음에 안 들어?”
하연의 입매가 축 처진 걸 보고 현조가 의아했다.

“괜찮겠어요? 손해 보시는 건데.”

“전혀. 어머니도 손수 밥을 차려주신 적 없어. 내겐 이 저녁상이 그 이상 값어치를 해.”
위로 같은 말에 하연이 슬픈 마음을 뒤로 물리고 방긋 웃었다.
3년은 아직 멀게 느껴지니까 생각하지 말자.

“거짓말이라도 너무 듣기 좋아요.”

“거짓말 아니야. 네가 차려주는 저녁은 이야기가 있잖아.”

“이야기요?”
현조에게 식탁은 어느새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하연과 함께 하는 저녁.
꽃 향이 스미는 식탁에 앉는다. 저를 생각하며 준비한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는다. 식탁 위로 재잘거리는 하연의 목소리가 떠다니면 하루의 피로가 사라진다.
하연은 무채색 같은 현조의 일상에 화사한 봄날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현조는 매일 저녁, 하연과 함께하는 식탁 위의 시간이 좋았다.
값어치로는 천만 원을 호가할 만큼.
현조는 궁금해하는 하연을 보며 다 말해주지 않았다.

“네 수다가 꽤 재미있거든.”

“제가 수다스러웠어요?”
하연은 손끝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럽게 고개를 숙였다.

“뭐, 좀?”

“그, 그건 수다쟁이 아내 컨셉이에요!”
민망함에 하연이 다짜고짜 컨셉 운운했다.

“그래. 다양한 컨셉의 아내, 나쁘지 않네.”

“네. 전 대배우니까요.”

“대배우님, 사인하세요.”

“티셔츠에 사인 해 드려요?”
하연이 장난스럽게 현조의 가슴에 손가락을 쿡 찔렀다.

“아니, 맨 가슴에.”
현조가 대뜸 셔츠를 들어 올렸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복근이 자태를 드러냈다.
맨날 바쁘다더니 몰래 운동하나?
드러나는 맨살의 부위가 커지는 만큼 하연의 눈도 커졌다.

“얼른 해.”
현조가 가슴 근육이 완연히 드러날 정도로 셔츠를 끌어 올렸다.

“볼펜이라 안 돼요. 아프잖아요.”

“괜찮아.”
현조가 다가와 볼펜을 쥔 하연의 손목을 잡았다.

“왜 이래요! 저리 안 가요?”
하연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탁.
음? 뭐가 이리 딱딱하지?
온기가 느껴지는 감촉에 하연이 눈을 살포시 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