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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소문 좀 내줘. (47/101)


47화. 소문 좀 내줘.
2022.06.12.



 
현조는 새집으로 이사 가려고 했다. 아무래도 보안이 신경 쓰여 아파트로 가길 원했지만, 하연은 지금의 집을 너무 좋아했다. 특히 주방에서 보이는 풍경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냥 살면 안 돼요?”

“너무 커.”

“집이 커야 요리하기도 좋죠.”

억지스러운 주장이지만 매일 저녁 다양한 밥상 앞에 앉는 그로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금 주방이 너무 좋단 말이에요. 아파트 주방은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밖이 보이지도 않고요. 네, 네?”

하연이 현조의 팔을 흔들었지만, 그녀의 몸만 실컷 흔들릴 뿐 그는 꿈쩍도 안 했다.

하연이 조르면 현조는 말문이 막힌다.


“대신, 사람 써.”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옆집을 사서 경호원과 직원 숙소로 쓰게 할 참이야.”

하연의 반응을 예상하고 현조는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다. 그녀가 이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민해서 내적 타협을 본 현조였다.


“정말요? 정말이지요?”

하연은 폴짝폴짝 뛰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래, 정말.”

“나 너무 좋아요! 미치게 좋아요!”

“그 집이 그렇게 좋아?”

하연은 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한 가지만으로 다른 건 다 감수할 수 있었다.


“현조 씨와 늘 함께하던 집이잖아요. 예쁜 테이블 위에서 도란도란 저녁을 먹은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난 잊지 않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많이 늙어도 난 이 집을 곱씹으며 위로받을 거니까요. 당신은 없지만 울지…… 아.”

너무 흥분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흘려버렸다.

당신이 없는 그날이 와도 울지 않고 이 집을 떠올리며 살아가겠노라, 라고 늘 다짐했더랬다.

하필 그 생각이 입으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현조의 고요한 눈빛이 하연의 얼굴에 닿았다.


“그, 그러니까 나중에 이혼하게 되면 그렇다고요. 이 집은 추억이 될 테니까요. 하하하.”

하연은 현조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간 줄 알았던 하연이 문을 빼꼼 열고 얼굴만 쏙 내밀었다.


“오늘 형님네 부부 온대요.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하기로 했거든요. 얼른 와서 숯불에 불 붙여요.”

조금 어색하긴 해도 그녀 특유의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현조는 하연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시간이 흘러 당신은 없지만.

시간이 흘러 하연에게 내가 없다.

시간이 흘러 내게 하연이 없다.

곱씹어 생각해도 썩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현조는 도래하지 않은 일을 쓸데없이 가정하지 않는 성격이라 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은 숯에 불을 붙이고.”

하연이 시킨 일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정원으로 향했다.


“웬 나무예요? 그건 어디서 났어요?”

현조가 나무가 담긴 박스를 가져왔다.


“집에 항상 있어. 참나무로 구워야지 몸에도 좋고 향도 좋지.”

“오, 많이 해 봤어요?”

“가끔.”

현조는 숯불 위에 나무를 놓고 토치에 불을 붙였다.


“우와! 남편 멋있다!”

하연이 감탄할 때 수희와 현태가 도착했다.


“도련님이 이런 것도 해요?”

수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장갑을 끼고 불을 붙이는 현조를 잠시 구경했다.


“아내가 시키면 해야죠.”

생각지 못한 대답이라 수희는 무성으로 ‘어머’라고 벙긋대다 지나쳤다.

정원에 다들 둘러앉아 와인과 함께 고기를 먹었다.


“아들이 구워준 고기도 다 먹어 보고. 좋구나.”

상희는 그간 아들의 무심했던 행동이 괘씸하기도 하지만, 바뀐 아들의 모습이 좋기도 했다.


“여보, 새우도 좀 구워요.”

하연이 새우를 불판 위에 와르르 넣었다. 그러곤 고기를 한 점 들어 현조의 입 앞에 가져갔다.


“아.”

하연이 입을 벌리라고 턱 아래서 종용했다. 웃으며 다정하게. 고기로 입술을 톡톡 치면서까지.

현조는 받아먹는 일은 좀처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가족들은 현조가 입을 벌릴지 말지 무척 궁금한 터라 시선이 일제히 현조의 입으로 쏠렸다.


“나 팔 아파요. 얼른, 아!”

현조의 입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하연이 고기를 쏙 넣어 주고 입술에 묻은 소금을 손으로 톡톡 털어주었다.

현조가 고개를 돌리자 가족들의 고개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좋은 구경 했네.”

현태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하연은 듣지 못했다.


“제수씨, 오늘 웬 바비큐 파티예요?”

직원들도 다 물리고 딱 가족만 정원에 모인 게 현태는 의아했다.


“아…… 그건.”

하연이 수희를 힐끔 보며 파티의 이유를 말했다.


“형님 완쾌하신 걸 축하하는 뜻에서 모이자고 했어요.”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공표했다. 물론 수희는 몰랐던 일이다.


“완쾌?”

현태가 영문을 몰라 수희를 바라봤다.


“그건…… 자궁에 혹이 좀 커서 수술했어요.”

“왜 말을 안 했어!”

현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 유럽 세미나 잡혔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복강경으로 하는 거라 입원은 길지 않았어요.”

“혼자 수술했어?”

“동서가 보호자로 왔었어요.”

모든 눈이 하연을 향했다.


“넌 알았어?”

현태가 현조를 추궁했다.


“처음 들어.”

현태는 기가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희가 수희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괜찮고?”

“네. 괜찮아요. 큰 병도 아닌걸요.”

“현태가 많이 놀란 것 같구나.”

“현태 씨가요?”

수희의 눈에는 화난 거로 보였다.


“그래. 현태는 놀라면 자리를 피한단다. 쟤는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말아.”

잠시 생각하던 수희는 쭈뼛대며 일어나 현태의 뒤를 따랐다.


“형수가 너한테 병을 순수히 이야기했어?”

현조는 평소 수희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더군다나 하연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하연은 우물쭈물하며 현조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고기 굽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현조가 일어나 하연과 함께 불판 앞으로 갔다.


“말해 봐.”

“그게…… 저흰 사이는 좋은데 따로 잔다고 했어요.”

“뭐?”

“목소리 낮춰요!”

“왜 그런 말을 했지?”

“형님은 아주버님하고 사이가 안 좋으신데 제가 눈꼴사나울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하연이 손을 말아 입 앞에 모으고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현조가 허리를 굽혀 귀를 가까이 댔다.


“현조 씨 핑계 좀 댔어요.”

“뭐라고.”

“소문 있잖아요. 그 소문, 밤에 힘을 못 쓴다는…….”

하연이 두 손을 맞잡고 꼬물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야…….”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현조는 웃고 말았다.


“급해서 다른 변명은 생각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순수해서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나 졸지에 문제 있는 놈 만드니까 좋아?”

“문제 있는지 없는지 저도 확실히 모르는데요?”

하연은 눈을 크게 뜨고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분히 장난기를 담은 얼굴로.


“확실히 알려 줄게. 오늘 밤.”

“네-에?”

되로 주려다 말로 받았다. 하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전 몰라도 괜찮아요.”

“아니야, 알아야지. 남편이 침대에선 어떻게 변하는지.”

“변하다니요?”

“사람이 아닐지도.”

이미 야수 같은 눈빛이 이글대고 있었다.


“자, 지금 가지. 이 긴 밤을 하얗게 불태우러.”

그의 눈빛에는 진실을 밝히고 싶은 의지가 감돌았다.


“그냥 한 말이에요!”

“아니야, 이참에 소문 좀 내줘. 침대 위에서 내가 어떤 놈인지.”

현조가 하연의 팔을 잡고 끌었다.


“그만 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형님에겐 나중에 거짓말했다고 둘러댈게요.”

하연은 방글방글 웃으며 익은 새우를 들고 테이블로 사라졌다.

*

수희는 현태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못 화가 나 있었다.

수희는 단 한 번도 화내지 않았던 남편인지라 조금 당황했다.


“넌,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네?”

“나 의사야. 제 여자가 어디가 아픈지, 수술은 하는지 모르고 있어야겠어?”

제 여자라니.

그런 말이 현태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여보…….”

“알아, 당신이 나 싫어하는 거. 하지만 같이 사는 이상 최소한 남편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냐.”

“난…….”

현태가 싫었나?

처음엔 욕심이 너무 없어서 내키지 않았다. 수희가 현조를 원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정확히는 현조라는 남자보다 앞으로 그가 오를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막상 현조를 볼 때면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함께 산다면 피가 마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결혼 초까지 그 욕심을 놓지 못했죠.”

현태는 앞이 아니라 자신의 옆에 앉는 수희를 가만히 바라봤다.


“알아요. 당신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다정한 사람이란 거. 하지만 서로 떠밀려 결혼했기에 당연히 애정은 없을 줄 알았어요.”

수희는 마음을 닫은 채 남처럼 산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결혼하고 한 번도…….”

한방을 써 본 적 없었다.

현태는 수희에게 단 한 번도 같이 자자고 한 적이 없었다. 수희 역시 당연히 각방을 썼다.

곧 이혼할 것 같아서.

살다 보니 현태에게 눈이 갔지만, 좀처럼 틈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에 자존심 센 수희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 한방을 쓴 적 없었지. 당신이 원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5년이 지났으니까 이젠 어른들도 이해하실 거야. 내 책임으로 돌려도 상관없어.”

“아니에요! 이혼하기 싫어요!”

수희의 형제들도 이혼에 재혼에 다들 말이 아니었다.


“알잖아요. 제 형제들 모두 가정이 엉망이라는 거. 그래서 나도 당연히 행복은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저, 돈으로 누리고 사는 거로 보상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수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난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그건…….”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현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 뻔히 알고 결혼했잖아. 태상과 유선이 우리 결혼으로 이미 취할 이득은 다 취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이혼한다고 생각했지.”

현태의 말에 수희는 반박하지 못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마음을 좀 열길 기다렸어.”

현태가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네?”

“처음부터 싫은 티를 너무 내니까 대화도 못 했잖아.”

현태의 작은 타박에 수희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싫은 게 아니라…….”

결혼 자체가 불만스러웠던 수희는 현태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함께 살다 보니 그의 자상한 면모에 마음이 갔지만, 그는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좋아졌지만, 당신 마음을 모르겠어요. 당신을 알아가고 싶은데, 당신이 틈을 안 주잖아요.”

수희의 고백에 현태의 눈이 확 뜨였다.


“당신이 날 싫어하는 줄만 알고.”

현태는 조금 멋쩍게 말했다.


“당신 그 얼굴을 어떻게 싫어해요.”

수희는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오히려 당신이 날 싫어하잖아요.”

“안 싫어해. 항상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꽤 괜찮았지.”

“네?”

놀란 수희가 눈을 끔뻑댔다.


“아버지 때문에 등 떠밀려 선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무나 하고 결혼했을까.”

“그럼…… 당신은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그래. 선보기 훨씬 전부터.”

“언제요?”

울려다 말고 수희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눈빛을 반짝이는 수희는 굉장히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예전 그 리셉션에서…….”

늦게까지 이어진 대화에 둘은 방으로 들어가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현태는 수희에 대한 감정을 놓치지 않고 모두 전했고 수희는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억울할 지경이었다.


“수희야.”

처음으로 따뜻하게 불리는 이름이었다. 젖은 눈길로 수희가 현태를 바라보았다.


“우리 새로 시작하자. 그간 너무 무심해서 미안해.”

말은 안 했어도 결혼 생활 내내 수희는 외로웠다.


“좀 일찍 말해주지 그랬어요.”

“시간이 필요했지. 당신이 당신 인생을 어떻게 살아나갈지 생각할 시간. 그래서 대답은?”

수희는 손으로 눈물 흐르는 얼굴을 가렸다. 실컷 운 뒤 손을 내렸다. 눈물 범벅된 얼굴로 대답했다.


“여보…… 나도 좋아요.”

수희의 대답이 마음에 든 현태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 돌연 눈을 장난스럽게 구기며 물어왔다.


“그런데 너, 어릴 때 나한테 오빠라고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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